어떤 문장은 읽는 순간 손이 멈춘다.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이 남긴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가 에세이에 옮겨 적었고, 카버를 읽은 누군가가 또 옮겨 적었다.
좋은 문장은 그렇게 번진다.
이 구절이 왜 오래 남는지 생각해봤다.
잘하겠다는 다짐도,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없이 그냥 쓴다는 것.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
요즘 사람들이 가장 못 하는 게 그거 아닐까.
씻고 먹고 자는 것 말고, 아무 기대 없이 매일 빠지지 않고 하는 무언가. 그게 그 사람이다.
직함도 아니고, 연봉도 아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하는 그것.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千里之行 始於足下. 천리 길도 발 아래의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도덕경> 64장에 나오는 말인데, 앞에 이런 구절이 붙는다.
"한 아름 되는 큰 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자라나고, 9층의 누대도 한 줌의 흙을 쌓는 데서 시작된다."
거창한 결과를 먼저 상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결과를 잊고 지금 발 앞의 한 걸음만 보라는 말이다.
노자가 이 말을 남긴 지 2500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사람들이 이걸 못 하는지 의문이다.
아마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자크 디네센의 삶은 어느 시점에서 바닥을 쳤다.
스물여덟에 남작과 결혼해 케냐로 갔다. 커피 농장을 일궜다. 화재가 났고, 경영이 기울었다. 이혼했다. 연인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농장도, 사람도, 아프리카도 다 잃었다. 덴마크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건 이야기뿐이었다.
그 후에 썼다. 출판사에 원고를 냈다가 거절당했다. 그래도 썼다. 마흔 후반에 첫 소설집이 나왔다. 책은 독자를 만났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라는 말이 그 이력과 겹쳐지면 다르게 읽힌다. 체념이 아니었다. 다 잃고 나서도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이 발견한 태도였다.
공자는 말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 첫 구절이다. 눈에 띄는 성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익히는 행위 그 자체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말이다. 결과에 매달리면 과정이 고통이 된다. 과정을 즐기면 결과는 그냥 따라온다. 쉬운 말이지만 실천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도 공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묵묵히라는 말밖에 안 어울리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한 번은 온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눈에 띄는 것도 없는데 계속 하는 시절. 이상하게도 그 시절이 지나고 나면 그때가 가장 자기다웠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그래도 인정이 필요하다.
타인한테 바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한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신 거울을 들여다본 적 있는가.
화장 고칠 때 쓰는 작은 거울 말고. 눈이면 눈, 입이면 입만 보다 보면 표정 전체를 본 기억이 없다.
처음 전신 거울 앞에 제대로 서면 낯설다. 얼굴은 수없이 봐왔는데 내 표정을 본 건 처음인 것 같은 느낌.
표정이 어둡다 싶으면 혼자 웃는다. 지쳐 보이는 날엔 파이팅 한 번 외친다. 우습지만 실제로 달라진다. 몸이 먼저 움직이면 기분이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이목구비가 반듯해도 눈빛이 꺼진 사람이 있다.
평범한 얼굴인데 자꾸 눈이 가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가 표정이다.
표정은 그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2013년 도브 캠페인에서 한 실험이 있었다.
FBI 출신 법의학 화가가 두 종류의 초상화를 그렸다.
하나는 본인이 묘사한 자신, 다른 하나는 낯선 사람이 묘사한 그 사람.
두 그림은 달랐다. 낯선 이의 눈에 비친 쪽이 더 밝고 더 아름다웠다. 우리는 자신을 볼 때 가장 가혹하다.
남한테는 쉽게 건네는 말을 자신한테는 왜 이렇게 아낀가. 내 안의 자아도 오래전부터 그 말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한 가지만 더.
몸이 엉망인 날에는 거울에 비친 모든 게 실제보다 나빠 보인다.
못 잔 날, 굶은 날, 하루 종일 앉아만 있던 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몸부터 챙겨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잘 안 된다. 그게 문제다.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千里之行 始於足下.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잘하려는 마음 잠깐 내려놓고, 오늘 분량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