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았다는 것과 깊이 살았다는 것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세네카는 이 비유를 곧바로 인간의 삶으로 연결한다.
백발과 주름을 보고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오래 살았다는 것과, 깊이 살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폭풍에 밀려 제자리를 맴돈 선원이 항해를 했다고 볼 수 없듯,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만으로는 삶을 살았다고 부를 수 없다.
스토아 철학은 이것을 아레테(ἀρετή)—덕성, 혹은 탁월함—의 문제로 봤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우주에 내재한 로고스(logos)의 일부로 이해했다. 그 이성으로 방향을 정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네카가 보기에 삶의 의미는 안온한 상황에서 오지 않는다. 고난 속에서 자신의 덕성을 시험하고 연마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표류하는 자와 항해하는 자의 차이는 파도의 높이가 아니라, 방향타를 쥔 손의 의지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지금, 이 물음은 오히려 더 무겁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리즘이 짜놓은 순서대로 하루를 소비한다.
스크롤을 내리고, 알림에 반응하고, 콘텐츠를 흘려보내다 잠드는 삶.
세네카가 지금을 봤다면, 폭풍 대신 피드(feed)에 표류하는 현대인을 가리켜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오래 떠 있었을 뿐, 항해는 아니라고.
편안한 선택만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키를 잃는다.
선택을 미루고 안전함에 기대는 것은 자유를 조금씩 포기하는 일이다.
거친 항해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파도와 맞선 사람만이 바다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자기 한계 너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눴다.
크로노스(chronos)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흐르는 물리적 시간, 시계가 재는 시간이다.
카이로스(kairos)는 다르다. 의미가 충만한 순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한 시간, 삶에서 진짜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다. 양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밀도로 새기는 시간이다.
크로노스를 많이 소유한 노인이 카이로스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오래 흘렀는가와 무관하게 그 삶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삶은 심장이 몇 번 뛰었느냐로 측정되지 않는다. 가슴이 뜨거워진 순간이 몇 번이었느냐로, 정신이 전율한 찰나들이 얼마나 조밀했느냐로 평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