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 배럴의 함정

IEA 32개 회원국이 비상 비축유 4억 배럴을 시장에 공급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IEA 사무총장 파티 비롤은 파리 본부에서 직접 밝혔다.


"우리가 직면한 석유 시장의 도전은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습니다. IEA 회원국들이 전례 없는 규모의 비상 공동 대응으로 화답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대 최대 규모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방출한 약 180만 배럴의 두 배가 넘는다.

IEA 창설 이래 여섯 번째 공동 방출이다.


4억 배럴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 양인지부터 따져보자.

전 세계 원유 소비량은 하루 약 1억 배럴이다. 단순 계산으로 4일치다. 그런데 맥쿼리 분석팀은 로이터를 통해 배포한 분석 노트에서 이 수치를 다르게 읽었다. 4억 배럴은 전 세계 소비량의 4일치이지만 호르무즈 해협 통과 물동량으로 따지면 약 16일치에 해당한다고 추산했다. 그러면서 한 줄을 덧붙였다.

"이게 별로 크지 않게 들린다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더 큰 문제는 속도다. 미국 전략비축유(SPR)의 최대 방출 능력은 하루 440만 배럴이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대통령 결정 이후 SPR 원유가 시장에 도달하는 데 13일이 걸린다. 시티그룹은 호르무즈 봉쇄로 하루 1,100만~1,600만 배럴의 공급이 차단되고 있다고 추산한다. 미국 SPR 최대 방출량을 나머지 IEA 회원국 방출량과 합산해도 이 공백의 일부만 메울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운송된다.

IEA는 현재 이 해협을 통한 원유·석유제품 수출량이 전쟁 이전의 10% 미만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저장 탱크가 가득 차면서 사우디아라비아, UAE, 이라크 등 주요 산유국이 이미 생산을 줄이고 있으며, 이는 세계 전체 산유량의 약 6%에 해당한다.


비롤 사무총장 본인도 이 한계를 직접 인정했다.

"안정적인 석유·가스 공급의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호르무즈 해협 통행의 재개입니다."


발표 직후 유가는 잠시 하락했다가 곧 다시 올랐다.

시장은 4억 배럴을 신뢰하지 않았다.


한국 얘기를 따로 해야 한다.

한국은 이번 방출에서 2,246만 배럴을 부담한다. 전체 4억 배럴의 5.6%다. 한국의 하루 평균 석유 소비량은 약 290만 배럴로 세계 8위다. 우리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가격이 더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3월 11일 기준 WTI 4월 선물은 배럴당 87.25달러, 두바이유는 113.55달러다. 26달러 이상 차이가 나고, 방향이 뒤집혔다. 보통 선물가격이 현물보다 살짝 높은 게 정상이다. 지금은 반대다. 중동산 원유를 지금 당장 구하기 어렵다는 공포가 현물 가격을 그대로 밀어 올리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같은 날 성명을 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단 한 리터의 원유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유가는 배럴당 200달러를 각오하라."


4억 배럴은 역대 최대가 맞다. 하지만 그 물량이 하루 수백만 배럴씩 풀리는 동안, 막힌 해협을 통해 차단된 공급은 하루 1,100만~1,600만 배럴이다. 비롤이 스스로 말했듯, 진짜 해법은 비축유가 아니라 호르무즈의 재개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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