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에서 페트로달러까지, 그리고 이란
달러는 금이었다.
정확히는,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만큼 신뢰받았다. 1947년 기준으로 미국은 전 세계 금 보유량의 70%를 쥐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이 나치 독일에 빼앗기지 않으려 금을 미국으로 옮긴 덕이었다.
유럽 각국은 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서 무기와 식량을 구매하면서 대금을 금으로 지불했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약은 그 물리적 현실을 제도로 바꿨다.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하고,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연동했다. 달러가 세계 경제의 척추가 된 건 이때부터다.
문제는 구조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 금이 늘어나지 않으면 달러도 늘어날 수 없는 구조였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은 베트남 전쟁 비용을 조달하면서 금 보유량과 무관하게 달러를 찍어냈다. 금은 그대로인데 달러만 넘쳐나자, 유럽 각국이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스위스가 먼저 움직였고, 맹방 영국까지 대규모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그는 투기꾼들이 달러를 공격한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달러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이 닉슨 쇼크다.
1970년대에 달러 가치는 3분의 1 가량 떨어졌고,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미국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기축통화의 자격 자체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미국이 찾아낸 출구는 석유였다.
1973년 11월, 키신저 국무장관이 사우디 파이살 국왕을 찾아갔다. 협상의 내용은 단순했다. 미국이 왕권을 지켜주는 대신, 사우디는 석유를 달러로만 판다. 이후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아 번 달러로 미국 국채를 매입했다.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면 그 돈이 석유 결제에 쓰이고, 남은 달러는 다시 미국 국채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달러 패권은 금이 아닌 석유 위에서 재건됐다.
이 구조가 왜 이란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려면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동에서 기름이 가장 먼저 발견된 나라는 이란이었다.
1901년 영국인 윌리엄 다시는 카자르 왕조로부터 석유 이익의 16%를 조건으로 60년 채굴권을 얻었다. 그 거래에서 태어난 회사가 훗날 BP가 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처칠은 석유의 전략 가치를 간파하고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POC) 지분 51%를 영국 정부가 직접 매입하게 했다.
이란의 석유는 영국의 자산이었다. 그 자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모사데크였다. 스위스에서 법학 박사를 받은 그는 1951년 4월이란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리로 선출됐고, 석유 국유화를 단행했다.
당시 미국 석유회사들이 베네수엘라, 사우디아라비아와 수익을 50대 50으로 나누는 관행을 확립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이란에 그 조건을 적용하기를 거부했다. 모사데크는 국유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국의 반응은 신속했다. 이란의 석유 수출을 봉쇄하고, 군함을 파견했으며, 이란 내 자산을 동결하고 국교를 단절했다. 이란의 석유 수출 수입은 영국의 봉쇄로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급감했다. 미국은 초기에 영국의 군사 개입을 막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내부 문서들은 1953년 이전에는 소련과 전면전을 촉발할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52년 여름이 지나면서 협상에 완강한 모사데크가 소련과 접촉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입장이 달라졌다.
1952년 11월 20일, 백악관은 영국과 함께 모사데크 제거를 위한 비밀공작을 추진한다는 NSC-136/1 계획을 승인했다. 공작은 미국 CIA의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과 영국 MI6의 부츠 작전(Operation Boot)으로 나뉘어 수행됐다.
1953년 8월, CIA가 테헤란에서 반모사데크 시위를 조직하고 군부를 움직여 모사데크를 체포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가 외국 정보기관이 설계한 쿠데타로 제거됐다. 이 쿠데타는 중동 석유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분수령이 됐다. 팔레비 왕조가 복원됐고, 팔레비 국왕은 군과 정보기관(SAVAK)을 왕 직속으로 재편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팔레비 국왕은 친서방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에서 서방화 정책은 종교계의 반발을 샀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국왕의 개방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1964년 추방됐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이란의 대중적 지지를 조직하며 반왕정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1978년 테헤란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팔레비 왕조는 무너졌다.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은 해외로 망명했고, 호메이니가 귀국해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됐다. 같은 해 11월, 미국이 망명한 팔레비의 미국 입국을 허가하자,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 미국 대사관에 난입해 미국 외교관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444일간의 억류 끝에 팔레비 왕가의 미국 내 재산을 이란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1981년 1월 인질이 풀렸다.
이란과 미국의 외교 단절은 그렇게 구조화됐다. 1953년 아작스 작전은 이란 석유를 서방의 손에 넣었다. 그 결과가 1979년 이슬람 혁명이었다. 모사데크를 제거하고 팔레비를 세웠지만, 26년 뒤 그 왕조가 반미 이슬람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단기 전술이 장기 전략을 망가뜨리는 구조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