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와 단군,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
종교는, 대체로 자기 울타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내부를 단단히 묶으려면 외부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 안에 있고, 그 밖은 어둠이라는 구도. 세계 주요 종교들이 공유해 온 이 오래된 문법을 대종교는 처음부터 거부했다. 선언이 아니라 규칙으로, 못을 박듯이.
1909년, 대종교(大倧敎)가 중광된 그해에 봉교과규(奉敎課規)가 반포됐다.
봉교과규란 대종교를 믿고 따르는 봉교인(奉敎人)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행동 규범이다.
그 안에 이런 조항이 있었다.
"봉교인이 견문을 넓히고 슬기를 더하기 위하여 타교에 들어가 참여하여도 금하지 말 것. 또한, 타교에 이미 가입한 자가 본교에 들어오고자 하면 곧 허가할 것. 한배검의 너그러우신 큰 뜻을 받들어 다른 종교를 공격하지 아니함."
일상의 행동 지침에 이런 조항이 들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타종교 존중과 이중 소속 허용이 신자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에 명문화돼 있다.
오늘의 기준으로도 낯선 이 조항이 교단 창립 첫해부터 존재했다.
7년 뒤, 1916년. 중광 교조 홍암 나철 대종사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며 밀유(密諭)를 남겼다. 일제가 대종교를 불법화하자 교단 존폐의 위기에 봉착한 그는 시봉자들을 이끌고 삼성사로 들어가 홀로 숨을 거뒀다.
그가 남긴 밀유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물기시교외인(勿岐視敎外人) 물이론역외인(勿理論域外人)" —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달리 보지 말라. 외국인이라 하여 따로 떼어 논하거나 차별하지 말라.
열여섯 글자. 수식도 없고 설명도 없다. 공개 선언이었다면 더 길고 화려했을 것이다. 비밀스럽게 타이른다는 뜻의 밀유였기에 이렇게 짧고 단호하다. 순교를 앞둔 사람이 가장 은밀하게,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이것이었다.
같은 해 발표된 중광가(重光歌) 10장 도연원(道淵源)은 이 사유를 경전의 언어로 완성한다.
도교·불교·유교·기독교·이슬람, 다섯 종교가 궁극으로 섬기는 신을 이름으로 호명하고 그 실상이 하나라고 선언했다. 창시자나 교리가 아니다. 각 종교의 신 자체를 불러내어 하나로 꿰었다.
"찾아보라 가닥가닥 한배빛 선가(仙家)에 천선종조(天仙宗祖) 석가(釋迦)의 제석존숭(帝釋尊崇) 유씨(儒氏)의 상제임여(上帝臨汝) 야소(耶蘇)의 야화화(耶和華)와 회회(回回)의 천주신봉(天主信奉) 실상(實狀)은 한 한배님"
세계 종교사와 비교해보면 이 시도가 얼마나 앞선 것인지 분명해진다.
종교 간 대화의 필요성을 공식 제기한 최초의 국제 모임은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평화회의였다.
로마 가톨릭이 타종교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일이다. 서구 신학이 수백 년간의 배타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중반이다. 대종교는 그보다 반세기 이상 앞서, 논의가 아니라 규범으로, 유훈으로, 경전으로 그 답을 써넣었다.
봉교과규는 신자의 일상 행동을 규율하는 제도다. 밀유는 죽음 앞에서 가장 은밀하게 건넨 정신이다. 중광가는 세계 모든 종교의 신을 하나로 꿰는 세계관이다. 규범과 유훈과 경전, 세 층위 모두에 포용이 새겨져 있다.
타종교를 인정하는 신학자 개인의 주장은 여러 종교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교단 창립 당시부터 신자의 행동 규칙으로 명문화하고, 순교 직전 비밀 유훈으로 남기고, 다섯 종교의 신을 경전 구절에 나란히 박아 넣은 사례는 대종교 외에 없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기독교계가 단군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지금이다.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의 명동학교.
기독교 교육자 김약연이 1908년 세운 이 학교의 교가에는 이런 구절이 담겨 있었다.
"흰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 차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가르는 나의 명동." 한배검은 단군을 가리킨다. 이 학교 교실 벽에는 예수와 단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보지 않았던 것이다. 윤동주, 문익환이 이 학교를 나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지니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앙과 민족정신이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해방 후 '홍익인간'이 대한민국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자리 잡은 과정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1945년 12월 조선교육심의회 제1분과위원회에서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처음 주창한 사람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자 기독교 목사였던 백낙준이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그가, 단군의 건국 정신에서 끌어낸 개념을 새 나라의 교육 이념으로 제안했다. 이 이념을 교육법에 공식 명문화하는 데는 이후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이 중심 역할을 했다.
물론 백낙준은 나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연세대에 기념관도 있다. 같은 학교를 나온 윤동주 선생이 하늘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했을 때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종교·신분·출신을 넘어 그 많은 사람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경계를 허문 종교가 가장 넓은 전선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개천절은 종교 기념일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석가탄신일이나 성탄절과 겹치는 측면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다. 석가와 예수는 외국의 성인이고, 단군은 이 땅의 성왕(聖王)이다. 그래서 모화사대의 극성기였던 조선시대에서조차 국가 제사에서 단군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땅에서 천명을 받은 개국시조로 예우한 것이다.
대종교는 중광 이래 이 원칙을 바꾼 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국조를 추념하고 존숭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믿든, 무엇을 믿든, 그것과 무관하게 우리가 공유해야 할 역사의 문제다.
백범 김구가 '조선인치고 대종교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는 말도 그 맥락에서 이해된다.
개천절 정부 기념식에 대통령이 다시 자리하기를 바란다.
단순한 의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