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에 잡초가 자라는 나라의 보훈

유해는 화룡시에 있다 - 대종교 삼종사 봉환을 요구한다

잡초가 사람 키만큼 자라 있다. 주변 가축들이 남긴 분뇨가 묘역을 뒤덮는다. 홍암 나철 대종사의 후손분들, 백포 서일 종사의 후손분들이 몇 년에 한 번꼴로 직접 찾아와 손으로 풀을 베고 묘소를 정리해 왔다. 그 정성이 눈물겹다. 동시에 이 장면이 너무도 부끄럽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후손분들이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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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이 누구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홍암 나철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뒤, 국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무기 대신 정신을 택했다. 일제가 나라를 빼앗을 수 있어도 민족의 혼은 빼앗을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1909년 대종교를 중광했다. 그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불법화하고 강제 해산 명령을 내리자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해 구월산 삼성사에서 생을 마쳤다. 국가보다 앞서 스스로 국가이기를 선택한 분이었다.


무원 김교헌은 그 뒤를 이었다. 조계사 터를 포함한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키웠다. 1919년 2월, 3·1운동보다 한 달 앞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의 첫 번째 서명자가 바로 김교헌 선생이었다. 그분은 대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를 조직했고, 그 군대가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했다. 우리가 청산리 대첩을 기억할 때, 그 배후에 있던 정신적 뿌리가 바로 이분이다.


백포 서일은 북로군정서 총재로서 총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다. 영화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그 위에 서일 총재가 있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자유시참변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생을 끊었다. 부하분들이 이역만리 땅에서 흩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두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죽는 방식조차 자신의 신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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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세 분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 대한민국 정부는 알고 있다.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중국 화룡시 인민정부가 1991년 문화유물보호단위로 공포한 곳이다. 위치가 불명확한 것도 아니고, 외교 접근이 불가능한 나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봉환은 수십 년째 제자리다.


한편 보훈부는 안중근 의사 순국 116주기를 앞두고 유해발굴 민·관 협력단을 발족시켰다. 보훈부 차관을 단장으로, 외교부·통일부·국회·학계 등 23분이 참여하는 체제다. 이 노력은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정확한 소재조차 확인되지 않았고, 중국 측의 협력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국가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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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유해의 소재가 명확히 확인되어 있고, 후손분들이 봉환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삼종사의 경우는 왜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되지 않는가. 못 찾아서가 아니다.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유해 봉환의 의미는 단순한 예우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자신의 건국 서사를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드러내는 행위다. 청산리 대첩을 국가 기념일로 삼으면서 그 전투를 가능하게 한 분들의 유해를 이역의 잡초밭에 방치한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편의에 따라 고른 역사다. 보훈이라는 말은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갚아야 할 은혜가 이렇게 명확한데, 국가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삼종사 유해 봉환은 더 이상 대종교의 일이 아니다. 역사 정의의 문제다. 보훈부가 중심이 되어 외교 채널을 열고, 중국 지방정부와의 실무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에 쏟는 의지의 반만큼이라도 이분들에게 쏟아달라.


독립운동은 안중근 의사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유해 봉환은 상징이 아니라 증명이다. 대한민국이 독립의 정신을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기념일에만 꺼내드는 장식으로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행동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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