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센트가 움직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국 대형 로펌의 협상 문법과 미중 정상회담의 진짜 의미

2026년 3월 15~16일, 파리 OECD 본부에서 베센트 재무장관과 허리펑 중국 부총리가 이틀간 회담했다.


재무장관이 협상 테이블에 나가는 건 직무상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베센트는 결이 다른 사람이다. 그를 단순히 트럼프의 심부름꾼으로 보는 시각은 틀렸다. 그는 1992년 소로스 팀의 일원으로 영국 파운드 공매도에 직접 가담했고, 소로스 펀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거쳐 독립 헤지펀드를 창업한 거시전략가다. 35년을 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특기는 하나다. 구조적 약점을 먼저 읽고, 상대가 버티는 힘이 소진될 때를 기다리는 것. 그가 직접 움직일 때는 이미 어디에 무엇을 걸지 계산이 끝난 상태다.


파리 협상을 마친 베센트는 기자들 앞에서 중국은 에너지 수요의 약 50%를 걸프 지역에서 공급받는다고 말했다. 같은 날 FT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중국은 이 해협을 통해 석유 90%를 얻고 있어 도와야 한다"고 했다. 두 발언의 수치는 다르다. 트럼프의 90%는 실제 통계와 거리가 있는 과장이다. 그러나 수치의 정확도보다 중요한 것은 무역 협상 국면에서 에너지 공급로를 대화 주제로 올렸다는 사실이다. 호르무즈가 막히면 중국 산업이 멈춘다는 구조적 취약점을 경고도 위협도 아닌 방식으로 꺼낸 것이다.


미국의 협상 전문 변호사들이 쓰는 방식이 있다. 상대를 직접 치지 않는다. 먼저 소송을 건다. 임시 금지명령을 신청한다. 상대가 방어에 지쳐갈 때쯤 합의 제안이 들어온다. 상대가 충분히 아파야 테이블로 나온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벼랑 끝이 먼저고, 합의는 그 다음이다.


트럼프는 나라를 상대로 그 방식을 쓴다. 관세 100%가 소장 접수라면, 희토류 차단은 임시 금지명령이다. 이란 전쟁을 이유로 베이징 방문을 미룬 것도 전술이다. 우리가 바쁜 게 아니라, 우리가 급하지 않다는 신호다.


물론 이 비유에는 한계가 있다. 법정에서는 판사가 결론을 내리지만, 외교 테이블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다 보고 있다. 압박의 의도가 이미 노출된 상태에서 상대는 전략적으로 반응한다. 그렇기에 베센트의 방식은 단순 압박이 아니다. 상대가 알면서도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호르무즈 발언에 직접 대응하는 대신 "중동 분쟁 완화에 전념하고 있다"는 말만 했다. 침묵과 우회가 이미 하나의 답변이다.


전문가들의 시각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USTR 부대표를 지낸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 부회장은 이번 회담에서 중국이 미국산 구매를 늘리고 무역 휴전을 연장 확인하는 정도가 현실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난징대학교 주펑 원장은 중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무역과 관세 문제이고 그다음이 부산 정상회담 합의의 연장이라고 짚었다. 동아시아연구원도 이번 정상회담의 성격을 전략적 화해가 아닌 경제적 휴전으로 규정했다.


세 곳의 시각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 이번 회담에서 대만도, 반도체도, 기술 패권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조적 갈등은 그대로 두고, 양측이 각자 승리를 선언할 수 있는 의제만 골라 합의한다. 보잉 항공기 대규모 구매, 희토류 공급 재개, 관세 유예 연장이 그 후보들이다. 지난 부산 회담 때도 같은 방식이었다.


패턴은 반복된다.


그 합의가 나오는 순간, 시장은 즉각 반응한다. 이란발 지정학 리스크가 완화 국면으로 읽히고, 호르무즈 긴장이 가라앉으면 원유 공급 불안도 함께 내려앉는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가 진짜 원하는 것은 관세가 아니라 유가 안정과 소비자 물가 하락이다. 회담 성사 그 자체가 이미 시장 신호다.


베센트 장관은 이번 회담에서 무역위원회 설치 방안도 의제로 논의했다. 일 년에 여러 차례 정상이 만나고, 무역위원회가 운영되면, 매 회담마다 의제가 있고 의제마다 가격이 붙는다. 로펌으로 치면 착수금이 아니라 성공보수 구조다.


1992년에도 그랬다.

영국이 버티는 동안 고통이 쌓였고, 결국 영국은 ERM을 나갔다. 그 딜과 지금 미중 협상은 성격이 다르다. 시장 베팅과 국가 간 외교는 같지 않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구조적 약점을 먼저 읽은 쪽이 타이밍을 고른다는 것. 베센트는 그 방법을 35년 동안 써왔다.


그가 파리에서 먼저 포지션을 잡았다.

회담이 열리면 유가는 내려간다.

나머지는 타이밍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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