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의 사진이 있다.
첫 번째는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 도착해 교민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태극기를 손에 쥔 아이들, 꽃다발을 목에 건 사람들. 해방이 되고도 석 달이 지나도록 발이 묶였던 사람들이 드디어 고국을 향해 첫 걸음을 뗀 날이다. 그 북적이는 사진 속에, 중절모를 눌러쓴 작은 노인이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재 이시영이다.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 후 대한민국. 세 나라에 걸쳐 공직자로 헌신했고 대종교 원로원장을 지냈으며,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다. 그가 그날 운 것은 기쁨 때문만이 아니었다. 망국의 해 온 가족이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한 지 36년. 살아서 고국 땅을 밟은 건 여섯 형제 중 그 혼자뿐이었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해방 후에도 석 달 가까이 귀국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군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 자격 귀국을 요구하는 미군정과의 협상 때문에 상하이에서만 20여 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백범은 한 사람의 체포와 처형을 장제스에게 요청한다. 그 이름이 안준생이다.
안준생은 도마 안중근 의사의 차남이다.
1939년 10월, 상하이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안준생은 만선시찰단의 일원으로 경성에 온다.
누나 안현생, 매형 황일청도 함께였다. 시찰단이 총독 미나미 지로를 면담하고 평양 일정을 끝으로 해산한 뒤, 안준생만 혼자 경성에 남는다.
10월 15일,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다.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 23주기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된 사찰이다. 절 이름 박문(博文)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에서 땄고, 사찰이 자리한 언덕 이름 춘무산(春畝山)은 이토의 호에서 왔다.
안준생은 그 이토의 영전 앞에 향을 피웠다.
다음 날 조선호텔에서 이토 분키치를 만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서자다.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했다. 10월 17일, 두 사람은 박문사에서 합동참배를 했다. 친일 기관지 경성일보는 이튿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아버지의 속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매일신보는 며칠 후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 잇다'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사진과 함께 실으며, 30년 원한이 풀렸다고 썼다.
이것이 총독부가 처음부터 기획한 퍼포먼스였다는 주장도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면서 부족한 병력을 조선인으로 채우려 했다. 황국신민화,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가 그 수단이었다.
조선의 영웅 안중근의 아들이 일본의 이토 앞에 고개를 숙인다면,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데 이보다 강력한 그림은 없었다.
경성일보의 표현대로라면, 내선일체가 정신적·사상적으로 하나가 된 장면이었다.
안준생에게 연민의 시선을 두는 이들도 있다. 형은 어린 시절 길가에서 행인이 건넨 과자를 먹고 독살됐다. 아버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머니를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다 상하이에 겨우 정착했다.
임시정부가 훙커우공원 의거 이후 급히 상하이를 떠날 때 그의 가족은 남겨졌다. 1937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이후 그는 사실상 적의 품 안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사정이 어떠했든, 안준생이 반민족적 행위를 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해방 직후 매형 황일청이 현지 한인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그 무게를 말해준다.
백범의 분노는 정당했다.
다만 이 상황을 누구보다 곤혹스럽게 바라보아야 했던 사람이 있다. 사진 속 백범 왼편에 선 여인, 며느리 안미생이다.
그녀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의 딸로, 안준생과는 사촌 남매 사이다. 안중근의 가문과 백범의 가문은 그렇게 한 가족처럼 얽혀 있었다.
독립운동의 세계는 그만큼 좁고, 그만큼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