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의 '아리랑'

광화문 광장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지난 3월 21일 밤, BTS가 3년 9개월의 공백을 깨고 정규 5집 <ARIRANG>을 들고 돌아왔다. 경복궁을 넘어 드론이 내려앉고, 광화문 월대에 도열한 무용수들 사이로 일곱 명이 걸어 나왔다.


RM은 앨범 이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곱 명이 모였을 때 우리다운 게 뭔지 생각했고, 우리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 끝에 불러온 키워드가 '아리랑'이었다고 말이다.


아리랑. 한이라고도 하고 그리움이라고도 하는. 정의하려 할수록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정서다. 그게 바로 이 노래가 수백 년을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백 년 전, 이 노래를 스크린 위에 올린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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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나운규가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무성영화 <아리랑>이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3·1운동의 고문 후유증으로 실성한 청년이 여동생을 겁탈하려는 친일파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일본 순사에 끌려가는 이야기였다. 상영이 끝날 때마다 극장 안에서 아리랑이 터져 나왔고, 일부는 만세를 외쳤다.


학계에는 이 영화에 대한 냉정한 시각도 있다.


<아리랑>은 총독부 검열에서 단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일제 관변단체가 조선인 강제노역자들을 달래는 선무 공작에 이 영화를 활용한 기록도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영화소설 <아리랑>의 줄거리에는 명시적인 항일 내용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족저항의 걸작'이라는 평가가 해방 이후에 덧씌워진 신화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이 나운규라는 사람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면 그의 영화제작사 이름을 봐야 한다.


'원방각사(圓方角社)'.


원(○), 방(□), 각(△). 이 세 도형은 대종교의 교기(대종교에서는 교기를 '천기'라 부른다)에 새겨진 상징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 천·지·인 삼재를 뜻한다. 우연히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나운규는 함경북도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은 1911년 대종교 회령시교당의 전무를 맡은 인물이었고, 그 집이 독립운동가들의 북간도행 루트에서 회령 거점 역할을 했다. 나운규는 1919년 3·1운동에 직접 참가했고, 북간도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뛰어들었으며, 독립군 비밀 조직에 가담해 철도 터널 폭파 임무까지 맡았다. 영화는 그 삶의 연장이었다. 필름 속 저항이 명시적이든 우회적이든, 그가 무엇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는지는 그의 삶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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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방각사라는 이름은 그 점에서 결정적이다. 대종교의 원방각 교상은 철학적으로 천·지·인과 대화하는 가치이며, 신과 물질과 인간을 잇는 상징이다. 나운규가 그 이름을 제작사에 새긴 것은 자신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를 밝힌 선언이었다.


백범 김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조선인치고 대종교인이 아닌 자 누가 있습니까? 저도 대종교인올시다."

동학과 불교와 기독교를 두루 거쳤던 그가 한 말이라 더 묵직하게 들린다.


대종교가 단순한 종파가 아니라 조선인의 정신적 뿌리에 닿아 있다는 인식이었다.


올해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다.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닌, 문화의 힘으로 세계에 행복을 주는 나라를 꿈꿨던 사람. 그 꿈이 100년을 건너와 광화문 광장의 보랏빛 물결과 겹쳐 보인다.


아리랑에 움직이는 한국인이라면, 그 노래가 어디서 왔는지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 영화가 항일이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보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무엇을 새기고 살았는지를 보는 것이 더 정직한 질문일 수 있다.


나운규가 원방각이라는 이름에 새긴 것, 백범이 스스로 고백한 것, BTS가 광화문에서 꺼낸 것. 이 셋은 시대를 달리하지만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구호가 아니다.


그걸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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