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시열 상교·운허 스님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이학수가 처음 이름을 바꾼 건 1911년이었다. 나라가 완전히 기울던 그 무렵, 그는 항일투쟁의 전위에 서 있던 민족종교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이시열로 고쳤다. 단순한 개명이 아니었다. 기존의 삶을 접고 새 이름으로 새 싸움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같은 정주 땅에서 24일 차이로 태어난 춘원 이광수가 어린 시절 함께 한문을 배우고 한집에서 지내던 팔촌 형제였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얼마나 비슷한 출발선에서 시작했는지를 보여준다. 한 사람은 근대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운동과 불교 경전 번역으로 삶을 채웠다. 같은 뿌리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두 줄기였다.
이시열은 대종교가 세운 동창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 1914년 5월 참교 교질을 받았는데, 수여 순서가 박은식, 신채호, 이시열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급의 인물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는지를 말해준다.
3·1운동 이후 이시열은 전선을 확장했다. 잡지 『경종』을 발간했고, 서간도 한족회의 기관지 『한족신보』 사장 겸 주필로 활약했다. 서로군정서에 가입했으며, 광한단을 결성해 무장투쟁에도 나섰다.
1920년 12월에는 단장 자격으로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했다. 그러나 귀국 후 일제에 발각되어 추격을 받았다. 강원도 회양군 소재 봉일사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박용하라는 이름으로 은천선사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그렇게 두 번째 이름이 시작됐다.
불교에 귀의한 이후에도 이시열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1929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민족교육운동을 이어갔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 방향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해방 뒤에도 그와 대종교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1946년 2월 지교 교질, 두 달 뒤인 4월 상교 교질을 차례로 받았다. 불교 승려가 대종교의 교질을 받는 일은 드문 것이었지만, 이시열에게는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동창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단애 윤세복 종사와의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연의 바닥에는 홍암 나철 대종사의 유훈이 놓여 있었다. 나철은 타 종교의 믿음과 대종교의 신앙을 하나로 보라는 말을 남겼다. 이시열은 그 말을 교리로 외운 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1946년 6월부터 이시열은 대종교 총본사 종리연구실에서 『삼일신고』, 『신리대전』, 『신사기』, 『회삼경』을 국역하고 주해하는 작업을 맡았다. 1954년에는 종사편집부 주간을 지냈다.
이 시기 그는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친일 전력으로 인해 몸을 숨기게 된 팔촌 형 이광수를 받아들인 것도 이때였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문인, 두 사람은 어린 시절처럼 다시 한 지붕 아래서 지냈다. 운허가 교장, 이광수가 교사로 광동중학교에서 함께 일한 시기도 있었다. 그 장면은 복잡하다. 용서인지 외면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운허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1964년, 한글 불경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불교 대중화를 위해 조계종이 동국역경원을 설립했을 때, 초대원장으로 추대된 것이 운허용하였다. 운허는 그 자리에서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라는 방대한 사업을 이끌었고, 초기 역경위원으로는 탄허, 법정, 조지훈, 서정주, 양주동 같은 당대의 학승과 문인들이 두루 참여했다. 법정 스님은 그렇게 운허와 함께 같은 역경 작업 안에서 인연을 맺었다.
훗날 『무소유』로 불교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법정 스님이, 그 출발점에서 운허라는 스승 곁에 있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봉선사 큰법당이 우리나라 불교 사찰 최초로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을 단 것도 운허의 뜻이었다. 그는 경전의 언어를 한글로 바꾸는 것을 넘어, 절집의 현판까지 한글로 세웠다.
대종교와 불교 사이의 접점은 이시열만이 아니었다. 대종교 최고 중진인 최전은 본래 순천 선암사 금암선사 문하에서 불도를 닦고 '경월당덕민'이라는 법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나철 대종사의 유고집을 간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할 만큼 대종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조선어학회에는 대종교 신자들이 다수 참여했으며, 승려 김법린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시열은 유교로 글을 배우고, 대종교로 싸웠고, 불교로 귀의했다. 세 개의 종교를 전향이나 탈출이 아닌 회통의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항일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이름을 세 번 바꾸면서도, 그 안에 담긴 뜻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서간도 지역에서 민족교육과 독립투쟁에 일조한 독립운동가이자, 유교·대종교·불교 3교를 회통한 종교인으로서 이시열의 위상은 불교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민족운동사 전체의 맥락에서 다시 조명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