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법원장, 역사학자, 유산균 과학자가 한 지면에 모였다.
1985년 7월 12일 금요일 동아일보. 사회면 한편에 제법 큰 지면이 할애됐다.
제목은 「단군은 민족 일체성의 상징」
세 사람이 각자 글을 썼다. 제7대 대법원장을 지낸 이영섭,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던 역사학자 박영석, 성균관대 교수이자 기독교인인 강국희. 공교롭게도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법조인, 역사학자, 과학자. 그런데 셋 다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단군은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단군성전(聖殿) 건립촉진 강연 안내가 나란히 실려 있다. 단군을 민족의 상징으로 공식화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반발하는 기독교계의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던 시기였다.
이영섭은 1919년 경기 양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나와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해방 후 판사의 길을 걸었다. 이화여대 법정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1961년 대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1979년 제7대 대법원장에 취임했으나 1981년 5공 등장 직후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나날이었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도시락 판사로 불릴 만큼 청빈했고 퇴임 후에도 상고심 사건만 수임했다. 민사소송법 분야의 권위자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1985년에 이 글을 썼다.
그의 논지는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단군은 신화적 요소가 있다. 당연한 얘기다. 그걸 가지고 믿을 수 있느니 없느니 따지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느 종파의 신도이든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뛰어넘을 수 없다. 단군은 사상과 체제를 초월하는 것이며 남북분단의 장벽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는 민족 정통성의 마지막 보루다. 법복을 벗은 지 4년 된 예순여섯 살의 법조인이 민족 정체성의 마지막 보루를 이야기했다. 지금 읽어도 날이 서 있다.
박영석은 고려대 문리대를 나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1970년 영남대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 건국대로 옮겨 1997년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1984년부터 10년간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그가 이 글을 썼을 때는 위원장 재임 1년째였다. 만보산 사건, 한민족 독립운동사, 청산리 전투와 대종교의 관계를 평생 연구한 사람이 쓴 글이었다.
그가 짚은 건 역사다. 청일전쟁 이후 암살 한두 건으로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자각이 생겼다. 민족 전체의 힘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정신적 구심점이 먼저 있어야 했다. 그 자리에 나철이 1909년 단군교(뒤에 대종교)를 세웠다. 1914년 총본사를 백두산 북쪽 청파호 근방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를 확장했다. 국내 남도본사는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불법화됐다. 탄압받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1920년 10월, 서일의 지휘 아래 김좌진·나중소·이범석 등이 청산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재만 한인사회에 뿌리내린 대종교 교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운반하는 등 물적·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였다.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쓴 글이라 건조하지만, 행간에 의도가 있다. 대종교를 단순한 종교가 아닌 독립운동의 인프라로 보는 것.
셋 중 가장 급진적인 발언은 역설적으로 과학자에게서 나왔다.
강국희는 1941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축산대학을 거쳐 일본 동경대에서 유산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한국야쿠르트 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내고 1979년 성균관대 생명공학부 교수로 부임해 2006년 정년 퇴임했다. 아시아유산균학회와 한국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학회를 창설했고 저역서만 다섯 권에 이른다. 후학들이 그를 '한국 유산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건 빈말이 아니다.
그의 인생 모토는 "전문가적 사명과 과학과 종교의 일치 추구"였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유산균 과학자로서 평생 한 일이었고, 민족 정체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의 글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단군성전 건립을 찬성한다."
조상을 받드는 정신은 종교 이전의 문제다. 성경의 특정 구절을 한국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성서 이해야말로 성경을 우상화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 계셨다.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조로 보내주신 것도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가 조상숭배의 미덕을 우상숭배로 죄악시하고 배척한 것은 크게 반성해야 할 문제"라는 문장이 1985년 신문에 실렸다.
유교 정신을 계승하는 성균관대의 학풍 속에서 26년을 보낸 사람이, 조상 공경을 우상숭배라 죄악시한 한국 기독교를 향해 이 말을 했다. 1985년이었다. 그 시절 한국 교회의 기세를 생각하면 가벼운 발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적 일탈이 아니었다. 과학과 종교의 일치를 추구한 사람이 도달한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이 기사가 실린 지 4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논쟁의 형태는 바뀌었다. 단군성전 건립 찬반에서, 역사 교과서 고조선 비중 논란으로, 개천절의 위상 문제로 변주됐다. 그런데 방향은 한쪽으로만 흘렀다. 단군을 둘러싼 공적 언어가 점점 줄어드는 쪽으로 말이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개천절 경축식장에 나란히 앉은 사진이 있다. 대종교가 보관하는 그 흑백 사진 속 단상 위로 태극기가 크게 걸려 있다. 그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적어도 취임 초기 박정희 정부는 국조를 기리는 날을 국가수반이 몸소 참석해야 할 자리로 여겼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이제 대통령은 개천절 경축식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국무총리가 대신 기념사를 낭독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공식 이유는 정교분리다. 개천절이 대종교의 영향이 강하다는 것. 그 논리라면 크리스마스나 석가타신일을 국가가 공휴일로 지정한 것도 설명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설명이 아니라 회피다.
더 이상한 건 그다음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앞세우며 통일을 말해왔다. 남북이 하나라는 것,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것. 그 뿌리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묻는 날이 바로 10월 3일 개천절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들은 없었다. 뿌리를 강조하는 말은 넘쳐났고, 뿌리를 기념하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통일을 이야기하려면 남과 북이 공통으로 기억하는 기원이 있어야 한다. 단군이 바로 그 기원이다. 북한도 개천절을 기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날을 국가수반 없이 치른다. 이 모순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 현장에서 단군은 점점 신화 속 인물로 축소된다. 문화 콘텐츠에서 국조는 소환되지 않는다. 시민사회에서 개천절은 연휴의 첫날이거나, 광화문 집회의 배경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빨간 날이다. 국조를 대하는 방식이 정부에서, 교육에서, 문화에서, 역사 서술에서 동시에 퇴색하고 있다. 어느 한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전방위적인 침식이다. 조용하게, 아무 저항 없이 그렇게 사라져 간다.
1985년 이영섭은 "단군을 부정하는 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 말이 40년 만에 훨씬 더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 지금의 세대가 저물고 나면, 단군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보다 특정 외국 종교의 성인들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많아질지 모른다. 과장이 아니다. 이미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서서히, 아무 소란 없이. 그리고 그렇게 된 다음에는 누가 와서 통일을 이야기해도, 공유할 뿌리가 없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민족은 없다.
세 사람이 한 지면에 모였던 그 여름날로 다시 돌아가보자. 법조인, 역사학자, 유산균 과학자.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던 세 사람이 1985년 여름 한 지면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단군은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민족의 뿌리는 이념과 신앙을 초월한다는 것.
이영섭은 2000년 별세했다. 박영석은 독립운동사 연구 외길을 걷다 2017년 85세로 세상을 떴다. 강국희는 정년 후에도 여전히 유산균 연구를 놓지 않고 초중고 과학강연을 다니며 "정열적인 삶"을 이어갔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았다.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지금은 그때보다 더 절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