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이 한국을 못 내버려 두는 이유

두 나라의 서로 다른 한국 콤플렉스

중국이 자기보다 수십 배 작은 나라를 그토록 신경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광개토태왕은 재위 기간(391~412년) 동안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땅을 차지했고, 남쪽으로는 한강 이북을 점령했으며, 5만 대군을 신라에 보내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몰아냈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며 제국이 무너졌고,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얼마 못 가 발해가 들어서면서 그 땅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중국 남조 사서 <송서>와 <양서>는 근초고왕 시대 백제가 요서 지방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직접 지배로 볼 것인지, 교역 거점으로 볼 것인지는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분명한 것은 4세기 백제가 황해를 건너 요동 너머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기록 자체가 중국 사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동북공정은 2002년부터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이 동북 3성과 함께 추진한 국가 프로젝트다. 학술 연구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역사적 명분을 만들고 조선족에게 중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핵심이었다. 남북 통일 이후 제기될 수 있는 동북 지역 영유권 문제와 조선족 정체성 문제를 미리 차단하려는 포석이기도 했다.


역설적인 건 바로 그 지점이다.

굳이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중국 스스로 그 역사가 불편하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110년 전 만주 서간도로 돌아가 보자.

1911년, 이회영·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3,500여 명의 독립군을 길러낸 이 학교의 교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 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배달나라'.

대종교 사관이 정립한 개념으로, 환웅에서 단군으로, 단군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정통 계보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사관을 '부여정통론'이라 부른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스스로를 부여의 후계자라 불렀다.

백제 성왕은 국호를 아예 남부여(南扶餘)로 바꿨고,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와 고구려는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명시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가는 이 부여정통론의 맥락 위에서 쓰였다. 중국(헌원자손)과 일본(동해 섬 중 어린것들)을 모두 '배달나라 조상들이 업어 기르고 젖 먹여 키운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빼앗긴 땅에서 독립군을 기르던 사람들이, 총을 들기 전 온 힘을 다해 불렀던 노래가 그런 가사였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한미동맹을 통해 주한미군이 주둔 중인 한국은, 중국 입장에서 동쪽 측면을 압박하는 존재다. 면적도 인구도 비교가 안 되는 이 나라가 중국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건, 순전히 규모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한 감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불편함이 잃어버린 땅에 대한 기억이라면, 일본의 불편함은 받아먹은 것에 대한 기억이다.


한반도에서 문자, 유학, 불교, 도자기 기술이 바다를 건너 전해졌다. 백제 근초고왕 때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들고 건너가 왜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6세기 백제 성왕 때 불교가 일본에 전해졌다.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당시 교토·나라·오사카 등 관서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1,182씨족 가운데 도래인 후손을 자칭하는 씨족이 326씨, 전체의 약 26%를 차지했다. 다수의 백제계 도래인들이 오사카와 나라 일대에 정착했으며, 지금도 일본 고대 문화의 심장부로 꼽히는 관서 지방이 그 터전이었다.


2024년 여름, 바로 그 관서 지방 고시엔 구장에서 낯선 노래가 울려 퍼졌다.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등학교가 '고시엔' 또는 '갑자원'이라 불리우는 학생야구 꿈의 무대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직후였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1947년, 재일 한국인들이 민족 교육을 위해 자비를 모아 세운 학교의 교가다.

'야마도(大和)'는 일본 고대 왜국의 국명 야마토를 가리킨다.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는 표현은, 이 학교를 세운 재일동포들이 바라본 관서 지방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도래인의 땅, 백제의 문화가 스며든 땅, 그러나 지금은 이국 땅이 된 곳에서 한국어로 부르는 교가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배달나라의 자부심을 노래했다. 교토국제고 교가는 그 "동해 섬", 야마도 땅이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였음을 노래한다. 11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두 교가는 같은 역사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가리키고 있다.


일본 역사서 <속일본기>에 따르면 간무 천황(재위 781~806년)의 생모 다카노노 니이가사는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후손이다. 2001년 12월, 당시 아키히토 천황은 생일 기자회견에서 이 기록을 직접 언급하며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794년 교토 천도를 단행해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천황은, 모계로 이어지는 이 백제 혈통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적극 활용했다.


국호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670년 왜국이 스스로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국내 공식화는 701년 다이호 율령 제정 때다. 백제 멸망(660년) 직후였고, 한반도에서 건너온 귀족과 유민들이 열도에서 자리 잡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그리고 역사는 뒤집혔다. 일제는 한국사를 왜곡해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가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의식을 주입했고, 한국 민족의 본래 특성이 사대성과 당파성이라고 가르쳐 패배의식을 심으려 했다. 선생이 제자에게 역사를 지어 먹인 것이다. 일본 정부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2021년부터는 교과서에서 '강제'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2024년에는 군마현이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를 철거했다.


그해 여름, 고시엔 결승전이 끝난 뒤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한국어 교가를 불렀다.

야구부원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혐한 전화가 걸려왔고, SNS엔 "한국어 교가를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이 올라왔다. NHK는 교가의 '동해'를 자막에서 '동쪽의 바다'로 바꿔 번역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중국에게 한국은 지우고 싶은 과거다.

일본에게 한국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뿌리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그 뿌리를 "젖먹여 기른 조상"의 언어로 노래했다.

교토국제고 교가는 그 뿌리가 내린 땅을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고 불렀다.

그 노래들이 여전히 불리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뽑아낼 수도, 그냥 둘 수도 없는 눈엣가시다. 중국에게도, 일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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