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농 류근, 동아일보의 첫 마음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대종교를 '조선의 정신적 식량'으로 여긴 류근은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대종교에 귀의했다.


1917년 대종교 2대 교주 무원 김교헌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포교와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류근은 서울 대종교 남도본사에서 호석 강우 등 간부진과 함께 교무를 전담하며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같은 해 류근은 안재홍 등과 함께 교원과 학생들에게 조선물산장려계를 지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고 중앙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3·1운동 직후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자, 류근은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한성정부의 정부체제 선택과 각료 선정에 관여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한동안 구속되었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오랫동안 금기시됐던 민간신문 창간운동이 일어났다. 중앙학교에 있던 류근을 찾아온 것은 당시 29세의 민세 안재홍이었다. 신문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달리 없었다. 두 사람은 매일신보 사회부장 출신의 이상협, 논설기자 장덕준, 오사카아사히 기자를 지낸 진학문과 함께 신문 발간 작업에 나섰다.


문제는 돈이었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은 김성수를 찾아가 신문사 경영을 청했지만, 김성수는 중앙학교와 경성방직 일에 전념하겠다며 거절했다. 청년들은 김성수가 존경하는 류근을 앞세웠다. 류근의 권유와 설득 끝에 김성수는 결국 승낙했다.


류근은 창간하는 신문의 제호를 '동아일보'라고 지었다.


우리 민족이 장래 풍요롭게 살아가자면 동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1920년 4월 1일 창간 당시 진용을 보면, 초대 사장은 박영효였고 편집감독에 59세의 류근과 49세의 양기탁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주간 장덕수는 25세, 편집국장 이상협은 27세였으며 발기인 대표 김성수는 29세였다.


류근은 편집감독으로 함께한 양기탁보다 꼭 열 살이 많았다. 류근은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라는 논설을 써서 신문의 편집 방향을 알렸다.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너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이다. …너는 조선민중의 권리보호자이다. …너는 조선민중의 문화소개자이다. …아, 동아일보야."


동아일보는 처음부터 불을 뿜었다. 창간호 1면에 실린 창간사 '주지를 선명하노라'는 장덕수가 썼다.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세 줄짜리 선언이었지만, 그 무게는 달랐다. 총독부가 허가해준 신문이, 허가해준 틀 안에서 일제의 통치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가 체포된 강우규 의사의 공판이 1920년에 열렸다. 65세 노인이 남대문역에서 수류탄을 던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술렁였다. 동아일보는 그 공판을 연일 보도했다. 재판정은 또 하나의 운동 현장이 됐고, 신문은 그 현장을 거리에 펼쳐 놓았다. 강우규는 같은 해 11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을 현상 모집하는 공고를 내보냈다. 민족의 시조를 지면에 불러내는 일이었다. 총독부가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다.


연일 압수, 정간, 발매금지.


창간 2주 만에 첫 발매금지를 당했다. 그해 9월에는 삼종신기를 조롱한 사설로 첫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만주에 취재를 나갔던 장덕준 기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군이 북간도 일대 조선인 2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을 현장에서 취재하다가 행방불명됐다. 한국 신문사 최초의 순직 기자였다.

류근은 잦은 감옥생활과 오랜 숙환으로 1921년 5월 20일 소격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1세. 독립운동을 하다 옥중에 있던 아들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이튿날인 21일자로 부음을 알리고 22일자 1면에 '조(弔) 석농 유근선생'이란 장문의 조사를 실었다.


"선생은…우리 반도 언론계의 원로이며, 평생을 사회에 바쳤으니 다만 교육계의 공로자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로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도 추도식을 거행했다. 한국 언론계의 선구자 석농 류근의 묘소는 용인 처인구 김량장동 현충탑 아래 노고봉 산기슭에 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증됐고, 2001년 10월에는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신문이란 게 원래 이런 것 아닐까.

권력이 불편해하는 것을 쓰고, 힘없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 적고, 가끔은 그 대가를 치르는 것.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는 그걸 알고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말이다.


지금의 동아일보가 창간 당시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는 1920년 4월 1일자 지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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