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과 그 제자들이 단군에게서 찾은 것
한글날이 되면 우리는 세종대왕을 떠올린다.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그 익숙한 서사.
그런데 정작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목숨으로 지킨 사람들이 누구를 마음속에 모셨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주시경(周時經)이었고, 이윤재였고, 최현배였고, 권덕규였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단군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단순한 민족 감정이 아니었다. 종교였고, 철학이었고, 저항의 근거였다.
주시경(1876~1914)은 원래 기독교인이었다.
배재학당을 다녔고, 선교사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전덕기 목사에게 물었다고 한다. "무력침략과 종교적 정신침략은 어느 것이 더 무섭겠습니까." 전 목사가 "정신침략이 더 무섭지"라고 답하자, 주시경은 말했다. "그러면 선생이나 나는 벌써 정신침략을 당한 사람이니, 그냥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질문이 그를 대종교(단군교)로 이끌었다. 과거의 사대주의가 종교 침략의 결과라는 자각이었다. 최익현의 추도식에 다녀온 직후의 일로 전해진다. 1909년에서 1910년 무렵,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시기와 겹친다.
이 개종을 학계 일부에서는 의심한다. 주시경의 장례가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당시 예법상 장례는 본인이 아니라 가족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개종 여부가 아니라 그의 사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느냐다.
1908년에 쓴 글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는 우주의 궁극적 존재를 '일(一), 본성(本性), 천(天), 리(理)'라고 표현했다. 이것들을 층위를 나눠 설명하지 않고 하나로 보았다. 주자학도 기독교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방식, 불교의 만법귀일과 가까운 사유다. 종교적 신비체험을 통한 깨달음의 언어다. 대종교를 통해 그것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바로 언어론으로 연결됐다. 궁극적 존재로부터 언어가 나오고, 그 언어는 민족마다 다르다. 우리 민족의 언어는 한글이다. 한글의 독립성은 국가의 독립성에서 비롯된다.
"국가의 성쇠도 언어의 성쇠에 달려 있고, 국가의 존부도 언어의 존부에 달려 있다."
그의 『국어문법』에 있는 말이다. 철학이 언어운동이 되는 순간이다.
주시경의 제자 그룹은 방대하다.
이윤재(1888~1943), 김두봉(1889~1961), 신명균(1889~1940), 권덕규(1890~1950), 이병기(1891~1968), 최현배(1894~1970), 이극로(1893~1978), 김윤경(1894~1970), 정열모(1895~1967).
이들은 나중에 조선어학회로 뭉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두 대종교를 믿었거나, 적어도 그 교리를 진지하게 공부했다는 점이다.
이병기는 1921년 대종교 경전 『신단실기』의 교열을 직접 맡았다. 그의 『가람일기』를 보면 대종교 행사에 꾸준히 참석한 기록이 나온다. 1921년 11월 2일 일기. 개천절 행사에 400여 명이 모였다고 적고, 그중에 윤덕영, 민병석 같은 귀족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빌었다.
"이 형제자매들을 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해주옵소서." 친일 귀족까지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발원이었다. 증오가 아니라 구제. 그것이 대종교의 결이었다.
권덕규는 『삼일신고』를 한글로 번역했다.
최현배는 1911년 경성고보 2학년 때 이미 나철을 따라 대종교에 다녔다. 담임 다카하시(高橋享) 교사가 "대종교에 다니는 것은 부당하니 그만두라"고 했지만, 최현배는 몰래 다니며 『신단실기』와 『삼일신고』를 손으로 베껴 읽었다.
이극로는 대종교 찬송가 『한얼노래』 37곡 중 26곡을 직접 지었다. 윤세복의 의뢰였다.
그런데 이들이 단군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일률적이지 않다. 여기에 이 논의의 깊이가 있다.
주시경은 대종교에 귀의하기 전인 1906년, 단군을 신이 아닌 역사 인물로 보았다. 환인도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덕이 있어 임금이 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신채호의 역사관과 가까운 관점이었다.
제자 세대로 오면 달라진다.
이병기는 삼신일체론을 받아들였다. 환인은 하늘에서의 한배님, 환웅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한배웅, 단군은 땅 위의 한배검. 셋이 하나다. 대종교의 기본 교리다.
권덕규는 환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최남선의 영향이었다. 대신 천·신·인의 삼위일체를 주장했다. 하늘에서는 천제, 신으로서는 소도(蘇塗), 인간으로서는 왕검. 같은 삼위일체지만 구조가 다르다.
이윤재는 또 달랐다. 그는 기자조선의 '기자왕조'와 중국의 기자는 아예 다른 존재라고 보았다. 대동강 유역에 부여 계통이 내려와 세운 자치민방이 있었는데, 중국 사상에 경도된 한문학자들이 그것을 기자에 끌어다 붙였다는 것이다. 평양의 기자릉도 고려 숙종 때 만든 것이고, 기자정전도 실측해보니 고구려 시대 시가 구획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나의 스승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단군을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각자 다르게 해석했다. 획일적인 교리 추종이 아니었다. 민족의 뿌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지적 탐색이었다.
이 그룹이 공유한 핵심 명제가 하나 있다. 우리 말과 글은 단군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주시경은 장백산 일대가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형이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언어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아무르강, 송화강, 요하 세 강 사이의 저지대가 태고에는 바다였고, 장백산이 섬처럼 격절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언어 독자성의 논거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최현배는 이것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우리 조선민족이 이 조선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결코 유사이후가 아니라, 유사이전 즉 단군께서 강림하사 우리 역사의 첫 페이지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있었음이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외다."
우리말은 단군 이전부터 있었다. "이 말의 울리는 곳에는 조선심이 울리며, 이 말의 펴나는 곳에는 조선혼이 핀다."
권덕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실증을 시도했다. 훈민정음 이전에 고유 문자가 있었다는 고유문자설이다. 삼황내문, 신지비사문, 왕문문, 남해 암석각문, 고구려·백제·발해·고려 문자의 예를 들었다. 더 조심스럽게는, 중국 한자도 조선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황제가 청구(조선)를 지나다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사문을 받았다면, 한자의 시원이 조선 상고 문자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지금의 학술 기준으로 보면 검증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주장을 편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일본 식민사학은 조선의 역사를 타율적이고 정체된 것으로 규정했다. 기자동래설을 강화해 조선 문명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도록 유도했다. 그에 맞서 이들은 조선 문명의 자생성과 독자성을 주장해야 했다. 학문이 저항의 도구였던 시절이다.
이 그룹에서 백두산이 갖는 상징적 무게를 놓치면 안 된다.
최현배는 단군이 태백산에 강림한 이유를 지정학적으로 설명했다. 아시아 대륙 동쪽 끝, 가장 먼저 새벽 빛을 받는 곳. 그 빛을 서방의 암흑세계에 던져주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이상이라 했다. 동방 대 서방의 구도였다. 식민지 백성이 오히려 문명의 발신자라는 자기 위치 재정립이었다.
권덕규는 1921년 동아일보 백두산 등정 관련 강연회에서 청중을 사로잡았다고 기록에 나온다. 강당이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 그는 백두산이 단군이 탄생한 곳이고, 중국의 태산도 백두산 줄기가 내려간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가 태산에서 천하를 작게 보았다고 했는데, 태산이 백두산 줄기라면 우리가 더 높은 곳에 서 있다는 의미였다. 청중이 환호한 이유가 있었다.
홍익인간 정신에 대한 최현배의 해석은 독특하다.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에서 시조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많다. 그런데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천상낙원에서 죄를 짓고 추락했다. 우리 신화에서는 인류를 구제하겠다는 이상을 품고 자발적으로 강림했다.
"이렇게도 고원하며 이렇게도 귀중한 이상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나온 우리 민족은 실로 인류계의 광영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
추락이 아니라 사명. 벌이 아니라 선택.
그것이 우리 건국 신화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이윤재는 개천절을 국민 경축절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기고한 동아일보 글에서 고려 이전까지는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마한의 천군, 고구려의 동맹, 신라의 답지, 고려의 팔관회로 이어지며 전 국민이 함께한 행사였다고 정리했다. 고려 이후 지나 사상에 침잠하면서 무속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올림픽, 서양의 크리스마스처럼, 개천절이 조선 사람 모두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윤재는 개천절과 러시아 혁명기념일이 같은 달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근본 의의는 다르지만 새로운 삶을 열려는 점에서 같다고 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무리하게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 읽을 수도 있다. 이윤재는 좌우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민족을 사유했다.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에 그것은 드문 태도였다.
한글학자들에게 기자조선 문제는 단순한 역사 논쟁이 아니었다. 조선의 문명적 기원을 중국에 둘 것인가, 아니면 단군에서 찾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일본 식민사학과 직결된 사안이었다.
주시경 자신은 대종교 귀의 이전에 쓴 글에서 기자조선을 인정했다. 제자들은 달랐다. 권덕규, 김윤경, 신명균은 기자조선이 한반도에 있지 않고 중국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김윤경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끌어와 평양이 기자의 도읍이 아니라, 기씨가 연(燕)나라에 밀려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거치는 곳마다 평양이라 불렀고, 지금의 대동강 평양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윤재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기자조선 자체가 없었다고 했다. 대동강 유역에 부여 계통의 자치민방이 실재했는데, 중국에 경도된 한문학자들이 그것을 기자에 끌어다 붙였다는 것이다.
평양의 기자릉은 고려 숙종 때 새로 만든 것이고, 기자정전도 고구려 시대 시가 구획이라는 실측 결과가 있다고 했다. 최근 학계 연구와 방향이 맞는다.
기자전설은 기자와 주왕의 대립에서 시작해, 전한 시대 복생 계통 학자들에 의해 기자동래설로 발전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 조선시대를 거치며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이윤재가 일제강점기에 이미 그 허구성을 논증하려 했다는 점은 지금 봐도 예리하다.
"그 시대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했고, 따라서 친일을 인정해야 한다거나 한국의 근대는 일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한글학자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주시경은 38세에 죽었다. 1914년, 한창 일할 나이였다. 이윤재는 1943년 함흥감옥에서 옥사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지 두 해 만이었다.
이들에게 한글은 목숨이었다.
그 버팀목이 단군이었다. 총칼로 싸우는 것이 무장독립운동이라면, 이들은 언어와 신앙으로 싸웠다. 말을 살리는 것이 곧 민족을 살리는 일이었고, 단군을 모시는 것이 침략자의 정신침략에 맞서는 일이었다.
우리는 한글날을 세종대왕을 기리는 날로 안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살아 있게 한 사람들이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붙잡고, 어떤 정신적 좌표 위에서 버텼는지는 잘 모른다. 주시경이 전덕기 목사에게 던진 질문이 그 출발이었다.
정신침략이 더 무섭다면, 정신으로 맞서야 한다. 그 정신의 이름이 단군이었고, 한글이었고, 그 둘은 이들에게 처음부터 하나였다.
말이 곧 혼이었다.
그 말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고 그 덕에 우리가 우리 말과 글로 사상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해방 후, 북쪽은 러시아 말로 남쪽은 영어로 소통하게 되었을지 모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