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편수회가 만든 틀
역사를 빼앗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1925년 이전에 일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3·1 운동은 일제에게 충격이었다. 총칼로 누른다고 민심이 꺾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무력 대신 역사를 건드리기로 했다. 1925년 6월 8일, 조선총독부 부설로 존재하던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총독 직할의 독립 관청인 조선사편수회로 격상된 것은 그 전략의 결과물이다.
인선부터 노골적이었다. 을사늑약 당시 서명에 가담한 이완용·권중현·박영효가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회장은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이 맡았고, 변절한 문인 최남선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기관이 무엇을 만들어낼지는 이미 구성원의 명단이 말해주고 있었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 37권을 비롯해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진』 3권을 간행했다. 일본과 한반도, 만주 각지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선별 기준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식민통치에 유리한 것,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 단군조선은 신화로 격하되었다. 역사가 아니라 설화로 밀려난 것이다.
이 작업을 정당화한 논리가 네 가지였다.
한국은 봉건제를 건너뛰어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다는 '정체성론',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항상 외세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타율성론',
조선의 붕당정치를 소모적인 파벌 싸움으로 깎아내린 '당파성론',
그리고 한민족과 일본 민족은 본래 같은 뿌리라는 '일선동조론'.
이 네 가지는 각각 따로 놀지 않는다.
하나의 서사로 수렴된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
그중 가장 정교한 왜곡은 일선동조론이었다.
한일병합 직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게 조선 조사를 의뢰했다. 일선동조론을 학문적으로 입증해달라는 요구였다. 도리이는 1911년부터 조선에서 체질인류학 조사를 시작했다. 조선인들을 일렬로 세워 두상을 측정한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학술 작업이 아니었다. 일본인이 동아시아에서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탐구하고, 그 기원을 한반도와 연결함으로써 병합을 정당화하려는 작업이었다.
도리이는 동아시아 각지의 고고학 조사에서 석기·청동기·철기라는 시대 구분 체계를 활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반도에 대해서만큼은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부정했다. 학문적 결론이 아니라 필요한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거기 맞춘 것이다.
일선동조론의 핵심은 간단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이다. 단군이 아우이고,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노미코토가 형이다. 한일병합은 침략이 아니라 두 형제가 다시 한 집안을 이룬 것이다. 논리 구조 자체는 매끄럽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같다'는 전제 위에 '위아래'를 만들어낸다.
조선사편수회가 남긴 것은 37권의 책만이 아니다. 한국사를 바라보는 특정한 시선, 스스로를 비하하는 특정한 습관이 그 안에 녹아 있다. 해방 이후 그 틀을 완전히 걷어냈는가 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역사 왜곡을 극복하겠다는 학문적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총칼로는 몸을 지배할 수 있어도 기억은 지배할 수 없다. 일제가 역사로 눈을 돌린 이유가 거기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