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의 집을 짓지 못한 나라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와 제일 먼저 하려 했던 일

1946년, 30년 넘게 만주와 중국 땅을 떠돌던 대종교 총본사가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그들이 가장 먼저 꺼낸 꿈은 하나였다. 서울 한복판에 단군전을 세우는 것.


명칭은 처음에 '단군 민족관'이었다. 단군의 영정을 모신 개천궁을 수도 중심에 건립해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대종교의 외곽단체로 출범한 단군전봉안위원회는 위원장에 이시영 전 부통령을 앉혔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가지 말해두자면 - 이 명단이 심상치 않다.


양명학자 정인보, 미군정 민정장관 안재홍, 초대 문교부 장관이자 철학자 안호상. 단국대 창립자 장형, 홍익대 창립자 이흥수, 국학대학 초대학장 정열모.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함기용.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포살을 모의했던 우덕순. 청산리 대첩의 영웅 이범석.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극로. 국어학자와 사학자, 바둑 명인, 국제법학자, 제헌의원까지.


독립운동의 뼈대를 이룬 사람들이 거의 다 여기 있었다. 이들은 대종교라는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장소로는 남산의 조선신궁 터가 첫손에 꼽혔다. 조선신궁은 1925년 일제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아 세운 신사로, 15개 건물과 380여 개의 돌계단으로 구성된 거대한 식민 지배의 상징이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스스로 철거하고 떠났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자리를 단군의 전각으로 되살리자는 제안은 국민 사이에서 상당한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억눌린 세월의 반동이었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단군, 그 이름을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세우겠다는 발상이었으니.


그러나 이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기독교계의 반발이 거셌다. 단군 숭배는 우상숭배라는 논리였고, 다종교 사회에서 국가가 특정 종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뒤따랐다. 민족주의 색채를 경계하던 미군정의 시선도 걸렸다. 결국 꿈은 물거품이 됐다.



이후에도 시도는 이어졌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단군전 건립을 지시했다. 정부 보조 1억 원과 국민성금으로 3개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임원 명단에는 대종교 인사들 외에도 김종필, 박순천 같은 정치인, 이병철·이동준 같은 경제인, 불교 이청담, 천도교 최덕신 같은 종교인까지 포함됐다. 그야말로 당대의 실력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독교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1995년의 국조성궁 건립 시도도 마찬가지 결말을 맞았다.



단군 숭배가 우상숭배인가, 하는 물음에는 잠시 멈추게 된다. 어느 나라든 건국 시조를 기리는 기념물 하나쯤은 당연하게 갖고 있다. 뿌리 없는 민족은 없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는 국조의 이름을 모신 공간 하나를 짓는 일이 번번이 막혔다. 종교적 논리로, 정치적 눈치로.


현재 대종교 총본사는 당시 단군 민족관의 설계도를 간직한 채, 새 총본사 건물을 짓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설계도만 남은 꿈.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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