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이 능력자를 제거하는 방식
잘린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해서.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린다면, 아마 아직 직접 겪지 않았거나, 겪었어도 무슨 일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름 없이 당한 일은 개인의 결함으로 처리된다. 구조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된다.
처음엔 분위기가 달라진다. 회의실에서 살짝 밀린다. 공유되던 정보가 늦게 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누군가 "저 사람, 조직 적응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흘린다. 능력 얘기는 없다. 항상 '분위기'나 '화합' 얘기다.
이게 한국 조직의 보이지 않는 규칙 중 하나다.
"튀지 마라."
일을 못하면 문제다. 그런데 일을 너무 잘해도 문제가 된다. 한 사람이 너무 도드라지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해진다. 비교가 생기고, 위계가 흔들리고, 암묵적으로 유지되던 균형이 깨진다.
조직은 그 상태를 싫어한다.
그래서 이상한 장면이 벌어진다.
성과를 만든 사람보다 그 사람을 견제하는 사람들이 더 강하게 연대한다. 평판을 건드리고, 분위기를 만들고, '조직 부적응'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간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저 사람은 우리랑 잘 안 맞아"로 끝낸다.
이 현상을 서구에서는 'Tall Poppy Syndrome'이라 부른다. 키가 큰 양귀비를 잘라내듯, 두드러진 사람을 끌어내린다는 의미다. 103개국 직장 여성 4,710명을 대상으로 한 국제 연구에서 응답자의 86.8%가 성취 때문에 직장에서 공격받거나 배제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60.5%는 야심 있어 보이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 여겨 스스로 성과를 숨긴다고 했다. 숨기는 사람이 열에 여섯이다.
"As a result of Tall Poppy Syndrome, high-performers are minimizing their skills and accomplishments — 60.5 per cent of those who responded to our survey believe they will be penalized if they are perceived as ambitious at work."_Dr. Rumeet Billan, CEO, Women of Influence+ — The Tallest Poppy 2023 공식 발표문 (2023. 3. 1.)- "Tall Poppy Syndrome의 결과로, 고성과자들은 자신의 역량과 성취를 스스로 축소하고 있습니다. 설문 응답자의 60.5%는 직장에서 야심 있는 사람으로 인식될 경우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다만 한국은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만큼, 이 현상이 더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작동한다. 한국의 '눈치' 문화는 본래 집단 조화를 위한 사회적 감수성이지만, 이것이 조직 내 압력 기제로 전환될 때 뛰어난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조직 감수성을 결여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한국의 한 대기업 직원 403명을 2파(wave) 종단 조사한 연구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확인됐다.
고성과자가 동료 집단으로부터 배제를 경험할 때, 그 심리적 고통은 번아웃과 직무 스트레스로 직결됐다. 그리고 배제의 이면에는 공통적으로 시기심이 있었다.
조직 화합. 이 말이 등장하는 순간 능력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다. 중요한 건 집단의 안정감이다.
한 사람이 너무 강하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질서가 바뀔 수 있다. 그러니 조직은 선택을 한다. 구조를 바꾸기보다 그 사람을 제거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이건 악의가 아니다. 시스템의 관성이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이 구조가 반복된다.
성과는 개인이 만들고. 보상은 조직이 가져가고. 문제는 개인이 뒤집어쓴다.
견제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다. 조직이라는 공동체의 균형을 지키려 했다고 스스로 믿는다. 문제는 그 균형이 혁신이 아니라 현상 유지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조직에 남는 건 '자르는 사람들'과 낮은 성과자들뿐이다.
"Top talent affected by Tall Poppy Syndrome will burn out, check out, and ultimately leave their jobs. What remains in an organization are the cutters and low performers."-Dr. Rumeet Billan — The Tallest Poppy 2023, Women of Influence+
_ "Tall Poppy Syndrome의 영향을 받은 핵심 인재들은 번아웃 상태를 거쳐 결국 조직을 떠납니다. 조직에 남는 건 끌어내리는 사람들과 낮은 성과자들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조직을 바꾸라는 말은 공허하다. 당장 뛰쳐나오라는 말도 현실적이지 않다. 남는 건 인식이다.
지금 이 조직에서 벌어지는 일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구조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에 이름이 없으면 개인의 결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달라진다.
"Those who had, or are, experiencing Tall Poppy Syndrome did not know these phenomena had a name. Not only does our data reveal the negative effects of being cut down because of one's achievements, it helps us understand how the cutting is being done — and most importantly, legitimizes the experience of women who, in many cases, have experienced this throughout their careers."_Dr. Rumeet Billan — The Tallest Poppy 2023 공식 발표문
-"Tall Poppy Syndrome을 경험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겪은 현상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우리의 데이터는 성취로 인해 끌어내려지는 것의 부정적 영향을 보여줄 뿐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게 해주고 — 무엇보다, 오랜 세월 이를 경험해온 사람들의 경험을 정당화해줍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면, 무너지는 방식이 달라진다.
능력 있는 사람이 조직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운 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능력이 조직의 균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계속 스스로를 고치려 든다. 알고 나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하고, 언제 떠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 인식이 첫 번째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