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단군 인식의 변화와 식민사학의 그림자
단군기원 4282년, 서기로는 1948년 가을의 대한민국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그해 9월 25일, 갓 출범한 정부는 법률 제4호를 통해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를 단군기원(단기)으로 확정했다. 교육의 기본이념으로는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국조 단군의 영정은 국가 표준으로 승인되었다. 개천절은 국경일이 되었다. 요컨대 해방 직후의 대한민국은 단군 정신을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 계승하겠다는 선언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그로부터 채 8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단군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 신문에서만 서기와 병기하는 단기 연호, 해마다 조용히 지나가는 개천절, 훼손 논란에 시달린 단군상들. 국조(國祖)의 자리는 어느새 특정 종파의 신앙 대상이라는 프레임으로 좁혀졌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그 답을 찾으려면, 단군을 둘러싼 갈등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 아래를 살펴야 한다. 거기에는 해방 이후에도 청산되지 않은 식민사학의 유산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식민사학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학자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학자도 아니고 이보다 그 뜻을 잘 나타내는 말도 없는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쓸 생각이다.)
건국 초기 대한민국에서 단군은 정치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구심점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민족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중심에 대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할 당시 의정원 29인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부통령 이시영,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감찰원장 정인보, 민정장관 안재홍이 모두 대종교와 깊이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박은식, 신채호, 김좌진, 이상룡, 주시경, 김두봉도 마찬가지였다. 대종교는 독립운동 지식인 사회의 정신적 지반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단군에 주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권이 붕괴되던 구한말, 중화질서를 숭상하던 성리학적 세계관도, 서구 열강의 논리도 이 민족의 존재 근거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 혼돈 속에서 민족의 자기 근거를 찾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 단군에 닿았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단군이 태백산에 강림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한민족은 다른 민족에 종속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과장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시 단군의 무게였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단기 연호 채택을 설득한 장면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호상이 내세운 논거는 단순했다. "일본 기원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단기 연호밖에 없다." 이승만은 즉시 동의했다. 독립선언서에도 단기를 쓰지 않았느냐고. 1948년 9월 25일 법률 제4호로 단기가 공용 연호로 확정되었고, 1949년에는 대종교 소장 단군 영정이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조 표준성상으로 공인되었다. 이 단군 영정은 대종교 중광(重光)의 핵심 인물 나철(羅喆)이 1910년에 봉안한 것을 1946년 화가 지성채가 모사한 것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인 강우(姜虞)가 부여에 숨겨 보존해온 영정이 그 원본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전혀 다른 흐름도 움직이고 있었다.
1962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정통성 보완을 위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에 나섰다. 공적조사위원회에는 김승학, 김학규, 김홍일, 오광선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심사위원석에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앉아 있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사학자들이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심사하는 자리에 버젓이 앉은 것이다. 분노한 독립운동가 한 명이 "너희가 독립운동에 대해 뭘 아느냐"며 일갈했고, 두 사람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병도와 신석호가 조선사편수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분명하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칙령으로 총독부 직할 기관으로 발족했다. 3·1운동 직후 대종교인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이 중국에서 저술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일본총독부가 당황하여 부랴부랴 만든 기관이었다. 목표는 단군조선을 역사에서 지우고, 조선은 주체적으로 역사를 이끌어본 적이 없으며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를 역사서에 심는 것이었다.
이병도는 1925년부터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신석호는 1929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입회하여 1930년 수사관보, 1937년 수사관으로 승진하며 해방 때까지 근무했다. 1938년 완간된 《조선사》 전 35권은 이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다만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공식 명단에는 오르지 않았다. 역사를 심판하는 역할이 끝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신석호는 해방 직후 1946년 국사관(현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을 창설하고 초대 관장에 취임했다.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자리를 잡으며 한국 사학계를 양분했다. 한 때,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에는 신석호의 재임 기간이 '1929년 4월~1965년 1월 21일'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에게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의 연장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기회주의를 넘어선 구조적 문제였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한국전쟁이 지나가면서,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뿌린 식민사관은 새 국가의 역사 교육 체계를 그대로 장악했다. 그들의 제자들이 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했고, 교과서를 통해 세대를 거쳐 전파되었다. 단군조선을 신화로 취급하고 한국사를 반도 안에 가두는 시각이 학문적 정설이 되었다.
더 기이한 반전이 있다. 1968년, 이병도, 이희승, 김상기, 신석호 등 국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현정회(現正會)를 창립했다. 단군을 신화로 취급하며 식민사관을 전파했던 이들이 단군을 모시는 단체를 만든 것이다. 현정회는 사직공원 안에 단군성전을 조성하고 매년 개천절과 어천절에 제례행사를 거행했다. 그리고 1977년, 현정회는 대종교의 단군 영정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단군 영정을 제작해 정부의 표준영정 지정을 신청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1976년에 대종교총본사에서 제작한 것만을 존중한다는 확인서까지 발급했으면서도, 불과 이듬해에 현정회의 영정을 두 번째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홍석창 화백이 그린 현정회 영정은 3차 수정과 심의를 거쳐 1978년 두 번째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았다. 정부의 해명은 이러했다. 대종교의 것은 신앙의 대상이고, 현정회의 것은 경모의 대상이라는 것.
표준이 두 개라는 것은 표준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 중복 승인의 배경에는, 단군을 민족의 국조가 아닌 특정 종교의 신앙 대상으로 격하시키려는 흐름이 깔려 있었다. 식민사관 아래서 신화로 취급받던 단군이 해방 후 국조로 복권되었지만, 그 복권을 주도한 대종교계와는 별도의 창구를 만들어 단군을 '관리'하려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연호 문제는 이 흐름의 결정판이었다. 1948년에 법으로 제정된 단기 연호는 1961년 5·16 이후 혁명정권에 의해 폐지되었다. 1961년 12월 2일 공포된 법률 제775호는 "현재 사용 중인 단기 연호는 외교 면을 비롯하여 일반 행정에 많은 애로와 결점이 있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단기 연호에서 서기 연호로 바꾸려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1962년 1월 1일부터 모든 공문서에서 단기가 사라졌다.
외교와 행정의 효율을 이유로 들었지만, 당시 일본은 메이지 이후의 연호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히브리력을, 태국과 네팔도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세계와의 교류에 연호가 장애가 된다면, 그 나라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검토는 없었다. 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연호다. 그것이 세계 표준이 된 것은 서구 열강이 근대를 주도한 결과이지, 그 자체가 보편적 합리성을 가져서가 아니다. 1945년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에 도입된 서기는 단기 시행 14년 만에 단기를 밀어냈다. 지금 단기 4359년이라는 숫자를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1980년대 들어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1985년 서울시는 사직공원의 단군 신전을 확충하는 단군성전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예산은 20억 원, 87년 완공 목표였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강한 반발이 이어졌고, 불과 5개월 만인 1985년 7월 3일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노신영 국무총리는 한국 개신교 대표들에게 정부는 단군 신전을 건립할 계획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어 1987년에는 국사 교과서 기술 논란이 불거졌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기술하는 방향을 잡자, 일부 기독교계에서 강하게 반발했다.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며 곰이 인간이 되는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단군을 신화로 취급하는 시각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조선사편수회가 심어놓은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역설적으로, 식민사관의 유산이 종교적 언어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1999년에는 또 다른 국면이 펼쳐졌다. 한문화운동연합회가 전국 학교와 공공장소에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369기를 세웠다. 1999년 7월부터 2002년 3월까지 32개월 사이에 70건의 훼손 사건이 기록되었다. 단군상의 얼굴이 쪼개지고 코가 잘려나가는 일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2002년 단군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하고 철거 운동을 본격화했다. 이들의 주된 논거는 헌법 제20조 2항, 즉 정교분리와 신앙의 자유였다. 특정 종교의 숭배 대상을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이 논리 자체는 검토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논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군이 특정 종교의 신앙 대상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 전제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묻지 않으면 논쟁은 입구에서부터 어긋난다.
이 점에서, 6대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낸 성명은 주목할 만하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천도교 지도자들은 "단군은 어느 한 종단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이자 상징"이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단군상 철거 반대 운동이 기독교 전체의 견해가 아니었음을 이것이 말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일제강점기 기독교계의 태도가 지금과 달랐다는 점이다. 북간도 명동학교는 기독교계 학교였지만 교가에 "한배검이 깃 차신 이 터"를 노래했고, 도서관 벽에 단군 영정을 예수 사진과 나란히 걸었다. 기독교인이었던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녔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기독교인 백낙준은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확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군정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심하다며 난색을 표하자, 홍익인간을 영어로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maximum service to humanity)"로 번역해 설득에 성공한 것이 그였다.
단군에 대한 반감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형성의 가장 큰 동력 가운데 하나가 조선사편수회의 유산, 즉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민족의 뿌리가 아닌 미개한 설화로 가르쳐온 교육 체계였다. 식민사관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에게 단군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으로만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두 개의 다른 질문이 혼동된 데서 비롯된다. 하나는 단군을 어떤 종교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 어떤 역사적 정통성 위에 서 있는가의 문제다. 전자는 개인의 신앙 자유에 속하고, 후자는 국가 정체성의 문제다. 이 두 질문은 구분되어야 한다.
단군에 대한 존숭에는 원래부터 종교적 신앙과 국조 존숭이라는 두 층위가 공존해왔다. 그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논쟁이 전개되니, 서로가 전혀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혼선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 식민사관이었다. 단군을 민족의 국조가 아닌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만 보이게 만든 것, 그 시각이 조선사편수회의 유산이다.
단기 연호를 폐지하고, 단군 표준영정을 중복 승인하고, 단군성전 건립을 백지화하고, 단군상이 훼손되는 일련의 사태를 놓고 보면 흐름이 어느 방향을 향했는지는 분명하다. 국조(國祖)라는 지위는 차츰 마모되었고, 단군은 점점 '어느 종교의 신앙 대상'이라는 좁은 프레임으로 밀려났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단군이, 해방된 나라의 시간적 기원이었던 단기가, 국가 교육 이념의 뿌리였던 홍익인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질문이 아니다. 청산되지 않은 식민사관이 우리의 국가 정체성을 얼마나 깊이 잠식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