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이승만 씨'라 불렀던 이유

공은 인정하되, 과는 덮을 수 없다

박정희는 평생 이승만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았다. 사석에서는 늘 '이승만 노인' 혹은 '이승만 씨'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강남 한복판에 공원을 조성하고, 백범일지를 고등학교 필독서로 지정한 그가 이승만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의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그 가족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도 이승만에게만큼은 끝내 그러지 않았다.


단순한 개인 감정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년, 동아출판사)에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평가를 글로 남겼고, 그 기록은 지금도 살아있다. 그 내용이 날카롭다 못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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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수립되어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이 규정되었지만, 그것은 한갓 문서상의 추상적 규정이었을 뿐이었다. 정부가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러한 자유권을 스스로 짓밟기가 일쑤였다." 5·16 이후 쿠데타의 명분을 세우려는 수사로만 읽기엔 필치가 너무 구체적이다. 그는 자유당 치하를 '정부의 강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정부의 탄압에서 벗어나려는 민권의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집권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시선으로 쓴 문장이다.



농촌에 대한 서술은 더 직접적이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12년 동안 기간 산업의 토대가 되는 전력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짓지 못하는 사치스런 소비경제로 말미암아 농촌은 메말라 갔으며, 메마른 농촌의 피와 살을 깎아서 도시만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썩고 그릇된 일만이 극심해져 갔다." 자유당 12년에 농촌 경제는 파탄 났고, 부정축재자들은 나라 경제는 내팽개친 채 제 배만 불렸다고 썼다. 선거 부정에 대해서도 가차없었다. "세계 선거 역사 가운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박정희가 이승만에 대해 사적으로 남긴 평가도 기록에 있다. "그게 독립운동이냐, 그따위 경력으로 정치에 나서 당파싸움이나 유발했다. 그 경력 자체가 엉터리다."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발굴하고 예우했던 박정희가 이승만의 독립운동 경력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만약 4·19가 없었다면, 거사 시점이 조금만 달랐다면 이승만의 말년은 조봉암과 같았을 거라는 게 당시 정치판의 암묵적 예상이었다. 죽산을 잔인하게 보낸 것처럼, 박정희도 우남을 그렇게 보냈을 것이다.


이 지점이 뉴라이트의 딜레마다.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면 할수록 박정희를 적대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두 사람을 함께 묶어 '리박스쿨'이라는 단체까지 등장했지만, 역사의 기록이란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물론 이승만에게 공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무리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알린 것은 사실이다. 6·25 전쟁에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이끌어 낸 것,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데 그의 역할이 없지 않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당대 민간에 떠돌던 평가가 '외교는 귀신, 정치는 등신'이었는데, 이 이상 명쾌한 요약도 없다. 농지개혁의 토대와 교육 확대라는 성과도 기록에 남아있다.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이승만의 전력 중에는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측에 한반도에 대한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이 있다. 독립을 외치는 수만 명이 총검 앞에서 죽어가던 그 시절, 미국에 조선을 대신 통치해달라고 청원서를 냈다.


신채호는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선출 소식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성토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이후 김원봉, 김창숙 등 51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했다. 결국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다.


1919년 8월, 이승만이 아직 임시정부 대통령 선출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President'라는 직함을 쓰기 시작하자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안창호는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에게 직접 전보를 쳤다.


"상해 임시 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이승만의 답신은 이러했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사과도 해명도 없이 입막음을 요구한 것이다. 이 전보 내용은 국가기록원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산의 외손자 필립 안 커디는 2024년 미주 한국일보 기고에서 이렇게 썼다. "도산의 부인이자 나의 할머니 이혜련은 도산이 이승만을 한 때나마 지원했던 것을 그의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전체 기간 동안 안창호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것이 가족이 기억하는 이승만이었다.


문일민 (독립운동가·임시의정원 의원)은 1925년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탄핵안 공동 발의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이 분열을 일삼는 것에 분노해,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 미군정 청사 앞에서 스스로 배를 갈랐다. 김구와 김규식에게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남은 자고로 내분의 제1인자이더니 이제 와서는 자기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던 임정의 법통마저 무시하고 단정 수립의 아집과 권세욕으로 민족 분열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1947년 말 이승만과 결별한 김구는 1948년 2월 10일 유명한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직접 이승만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는 이승만을 겨냥한 것이었고 당시 모두가 알았다. 이후 1949년 6월 김구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국회 조사보고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안두희에 대한 군의 특혜 처우가 불가능했다고 결론 지었다.


집권 이후의 기록을 보면 '과'는 더 무겁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이렇게 썼다.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 해방 16년이라는 시간표 위에 그가 올려놓은 단어는 독재, 부패, 해방 귀족이었다. 4·19를 '학생혁명'으로 규정한 것도 박정희였다.


2003년 정부 진상조사위원회는 제주 4·3 사건의 최종 책임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결론 내렸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인명 피해는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 9285동이 소각됐다.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섬 인구의 최대 8분의 1이 죽거나 사라졌다.


6·25 전쟁 중에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자행됐다. 10만 명에서 20만 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국가범죄였다고 결론 지었다. 좌익 전향자를 관리한다며 만든 단체의 회원들을 전쟁이 터지자 잠재적 적으로 분류해 재판도 없이 집단 처형했다. 그 명단에는 정치사상범뿐 아니라 배급을 받기 위해 이름을 올린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두룩했다.


2011년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했다.

합법 정당의 대표를 간첩으로 조작해 사형에 처한 사법살인이 공식 확인된 것이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조차 '조봉암을 죽이지 말라'고 이기붕에게 통보했다. 그 경고마저 무시했다. 박정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바로 "이승만 씨가 꾸며 놓았던 자유당이야말로 자기 파만의 수지타산을 제일로 치는 정당의 본보기"였다.


역사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이승만의 공을 설명해보려 해도, 구미위원부 활동이나 교육 확대 같은 성과를 나열하다가 결국 그의 허물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고 고백한 것은 특정 진영의 시각이 아니라 현장의 솔직한 목소리다. 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적극적 재평가 논란에 선뜻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도 사상 대립이 학문의 공간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침묵이 역사를 중립화시키지는 않는다.


공은 공대로 기록하면 된다. 그러나 박정희조차 기록으로 남긴 그 평가, "이승만 노인은 눈이 어두운 독재자다"라는 문장이 단지 쿠데타의 수사가 아니었다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수만 명의 죽음과 한 사람의 사법살인이 증명한다.


수만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정치 경쟁자를 사법으로 살해하고, 헌법을 수차례 뜯어고쳐 권좌를 지키다 결국 학생들의 피에 쫓겨난 사람을 '건국의 아버지'로 호명하는 것은, 그 건국의 피해자들에게 두 번 죽음을 강요하는 일이다.


과가 공보다 크다면, 그 무게를 균형 있게 달아야 하는 것이 역사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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