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묻힌 독립운동가들-분단이 만든 또 하나의 역사

화강암 비석 위에 새겨진 돌사진, 그리고 약력. 누군가에게는 '반일애국지사', 누군가에게는 '애국지사', 또 누군가에게는 '동지'. 호칭은 달라도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같다. 일제강점기, 그 지독한 35년.


문제는 그들 중 상당수가 분단이라는 역사의 칼날에 두 동강 나 있다는 점이다. 북한 땅에 묻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해방 후 북쪽을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이 지워지거나 서훈이 막혀 있다. 이것이 지금도 우리가 풀지 못한 숙제다.


북한 평양에는 대한민국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두 곳의 국가묘역이 있다.

하나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자리한 혁명열사릉, 다른 하나는 평양 서남쪽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이다.


혁명열사릉은 조선로동당 창건 30주년인 1975년 10월에 조성되었다. 그 전신은 1954년 대성산 기슭에 만들어진 혁명렬사묘역이다. 이곳에는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웠거나 그와 직간접으로 연계된 200여 명의 이른바 항일혁명열사들이 안장되어 있다. 비문 위에 흉상이 올려져 있다. 격이 높다는 표시다.


애국열사릉은 1984년 위치를 정하고 1985년 10월 착공해 1986년 9월 17일에 준공되었다. 당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190기의 유해를 한자리에 모셨다. 혁명열사릉의 흉상 대신 돌사진이 새겨져 있다. 정문 높이도 혁명열사릉의 3분의 2 수준이다. 위계가 다르다. 그 뒤로도 안장 인원은 계속 늘어 2014년 말에는 890기를 넘어섰다.


누가 어느 묘역에 묻히는지는 체계적으로 결정된다. 북한이 2008년 공포한 사회보장법은 국가공로자를 항일혁명투사, 항일혁명열사, 반일애국열사 등 7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그 분류 기준이 묘역의 위계를 결정하고,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지워지는지를 가른다. 죽은 자를 어디에 눕히느냐가 곧 정치다.


여기서 북한 체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북한에게 항일투쟁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북한 헌법 서문에는 "항일혁명투쟁을 조직 령도하시여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고 조국 광복의 력사적 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고, 2012년 개정 조선로동당 규약 서문에도 "항일혁명투쟁과 조국해방전쟁"을 체제의 근원으로 못 박았다. 항일은 북한의 건국 신화이자 정체성의 뼈대다.


그 묘역은 단순한 추모 공간이 아니라 체제 정통성을 재생산하는 장치다. 북한 주민들은 태양절, 광명성절, 조선로동당 창건일은 물론 추석 같은 민속 명절에도 혁명열사릉 참배를 강요받는다. 체제 위기가 심화될수록 이 묘역은 더 자주 소환된다. 경제난과 국제사회의 고립이 가중될수록 김정은 정권은 반복적으로 혁명선배들의 항일을 불러내어 체제를 버티는 동력으로 삼는다.


이 맥락에서 남북 간 종교 교류의 구조적 한계를 짚어야 한다.

북한에는 조선불교도연맹, 천도교청우당,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천주교인협회 등 여러 종교 단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자유로운 신앙 공동체가 아니다. 천도교청우당이 그 전형이다. 해방 당시 북한에서 천도교 신도는 280만 명에 달했다. 북한 최대의 종교 세력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를 거치며 노동당의 위성정당으로 전락했다. 자생적 지도부는 숙청되었고 1959년에는 시·군 이하 조직이 전부 해체되었다. 이후 천도교청우당은 남북대화가 필요할 때마다 창문처럼 열렸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다시 닫혔다. 1970년대 남북대화 국면, 1980년대 통일전선 전술, 1986년 최덕신의 망명 이후 류미영의 당수 승계까지 - 모두 대남선전과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연출이었다. 조선불교도연맹도 다르지 않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남북 종교 교류가 활성화되던 시기, 북한의 종교 단체들은 한국 종교계와 교류·협력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 형식은 언제나 같았다. 북한 지역에서 행사를 열고, 한국 종교계가 물자와 설비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종교계는 남북 관계에서 언제나 말석에 앉았다. 북한 헌법 제68조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적으면서도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종교 교류의 깊이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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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항일투쟁은 다른 맥락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남북이 종교를 통로로 소통할 때, 어떤 종교가 항일이라는 북한 체제의 핵심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공유하는가. 어떤 종교가 단군이라는 민족동질성의 원점을 함께 거론할 수 있는가. 어떤 종교가 북한의 정체성 서사인 항일과 남한의 독립운동 정신을 같은 맥락에서 꿰뚫는가.


세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종교는 단 하나다. 바로 '대종교'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민족 종교이자 한국 근대 독립운동사의 실질적 중추였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지휘부가 대종교였다.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연대장 이범석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시영 형제도, 교장을 맡은 윤기섭도 대종교인이었다. 단군의 홍익인간은 항일의 정신적 기반이었다. 그것이 북한의 헌법 서문에서 말하는 항일혁명전통과 다른 언어로 표현된 같은 뿌리다.


서로군정서·신민부 유격대원이자 대종교 교무총괄자를 지낸 호산 박명진이 1964년 구술한 『대종교독립운동사』는 대종교 각 도본사별로 소속 독립운동가 명단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북한의 묘역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대종교 연결을 직접 증명한다.


조소앙은 동일도본사 명단에, 윤기섭과 조완구는 각각 서일·서이도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극로, 홍명희, 안재홍, 정인보, 명제세는 모두 남일도본사 명단에 함께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 교조가 순교할 때 직접 시봉했던 대종교인이었다. 이 이름들 모두가 지금 평양의 묘역에 잠들어 있다.


북한은 기독교를 외세의 종교로 경계하고, 불교를 봉건 종교로 분류하고, 천도교는 관변화했다. 그러나 단군을 국조로 삼는 대종교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부인하기 어려운 지점에 있다. 북한도 단군릉을 발굴하고 단군을 실존 역사 인물로 공인했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북한의 민족 서사와 정면 충돌하지 않는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그 대종교인들이 북한의 묘역에 잠들어 있으며, 그 항일의 언어가 북한 체제의 뼈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인물 중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두 명이다. 최효일과 최윤구다. 최효일은 평북 철산 출신으로 국민부 특무 제1대장으로 활동했다. 박차석·정주양 등과 함께 1930년 6월 군자금 모집 중 풍산경찰서 내중주재소 순사부장을 처단했다. 체포 후 1932년 4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은 1995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북한이 그를 혁명열사릉에 안장한 이유는 다르다. 김일성의 숙부 김형권 등이 조직한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한 경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남북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기억된다. 그 자체가 분단의 초상이다.


최윤구는 평북 초산 출신으로 조선혁명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38년 2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합류하여 투쟁을 이어가다 그해 12월 전사했다. 남한 정부는 2005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은 비석에 새겨진 약력에 따라 '반일애국지사', '애국지사', '항일혁명렬사'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반일애국지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간접적으로나마 김일성과 연결된 인물들이다. 오동진·장철호·강제하·김보안·박민구·리관린 등 6명이 이에 해당한다.


오동진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광복군총영 관장, 정의부 군사위원장총사령관을 역임하며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1927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대한민국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장철호는 독립장(1990), 강제하와 김보안은 독립장(1995)을 받았다. 이들과 함께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 리관린은 광복군총영에서 군자금 마련에 힘썼고 1920년 신안주재소 습격 후 '여걸'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해방 후 중국에 머물다 1970년대 북한으로 귀국한 것이 서훈 배제의 이유로 추정된다. 같은 전선에서 싸웠으나, 해방 후 발걸음이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역사 밖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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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독립군사령'으로 표기되어 이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34년 9월 20일 일제 밀정의 꾐에 빠져 순국했다. 일제는 그의 무덤을 파헤쳐 작두로 목을 잘랐다고 전해진다. 북한은 1960년 환인현 삼성자에 있던 양세봉의 유해를 평양으로 이장했다. 대한민국도 1962년 독립장을 추서했고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가묘가 있다. 남북 모두에 무덤이 존재하는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다.


애국열사릉의 '애국지사'는 주로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이다. 김규식·유동열·오하영·윤기섭·조완구·최동오·엄항섭·조소앙 등 8명이다. 이 중 박명진의 『대종교독립운동사』에 의해 대종교인임이 직접 확인되는 이들이 있다.


<윤기섭> . 박명진의 기록은 그를 서일도본사 명단에 올리고 있다.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고 학감과 교장을 역임하며 독립군을 훈련시킨 인물로, 1918년 만주에서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함께 자리했다. 그가 대종교인 이극로와 1922년 임시정부의 군사 교육서 『보병조전』을 편찬하면서 만든 우리말 군사 구령 '차렷', '열중쉬어'는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우리말 구령이 있기전까지 일본식 구령인 '기착'을 썼다. 1922년 상해 인성학교 학감으로 활동하면서 대종교 중진이던 김두봉과 나란히 근무했고, 해방 후에는 위당 정인보의 뒤를 이어 대종교가 세운 국학대학 학장을 맡았다. 납북 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대통령장(1989).


<조완구>. 박명진의 기록에서 서이도본사 명단과 임시정부 참가 인물 양쪽에 이름이 올라 있다. 그는 나철이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하던 바로 그 첫해에 입교했다. 입교 당시 교명(敎名)을 '조양(趙亮)'으로 받았으며, 시교사로 임명되어 포교에 나섰다. 1914년 총본사가 북간도로 이전할 때 함께 따라갔고, 1916년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자 총본사 부전리로서 직접 그 유해를 청파호에 안장했다. 나철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서 챙긴 사람이 조완구였다. 이후 사교(司敎)와 대형(大兄) 호를 받을 만큼 교단의 핵심 인물이었고, 해방 후에는 도형(道兄) 호까지 추승됐다. 임시정부 내무부장을 지낸 그는 납북 후 북한 당국이 대남방송 원고 작성을 종용했으나 끝까지 거부했다. 1954년 10월 27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대통령장(1989).


<조소앙>. 박명진의 기록에서 동일도본사 명단과 임시정부 참가 인물 양쪽에 이름이 올라 있다. 삼균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단군의 홍익인간과 신지비사에 두었으며, 1915년 스스로 창안한 육성교 여섯 성현의 첫머리에 단군을 올렸다. 1918년 그가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서명자 39인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환국 후에는 단군성적호유회를 결성해 단군 유적 보존 운동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1950년 5·30총선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사망했다. 그의 삼균주의는 애국열사릉의 비석에 새겨진 채로 평양에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장(1989).


납북된 이들 중 상당수는 1956년 7월 북한이 대남선전 차원에서 조직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상무위원을 맡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부분 1989년과 1990년에 건국훈장을 받았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는 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몸은 평양에, 위패는 서울에 있는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지만 해방 후 북한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지금도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 있다. 박문규·백남운·이만규·이영·허헌, 그리고 대종교인 이극로와 홍명희다.


<이극로>. 박명진의 기록에서 남일도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그의 대종교 인연은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간도 환인현에서 윤세복이 세운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대종교 경의원 참사로 활동했고, 1942년 6월에는 대종교의 교가 '한얼노래' 37곡 중 26곡의 가사를 직접 지었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사건의 핵심 인물로 체포되어 고문을 견디며 한글을 지켰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뒤 북한에 잔류했다. 독립유공자 서훈에서는 지금도 제외되어 있다. 그 한얼노래는 지금도 대종교 의식에서 불린다.


<홍명희>. 박명진의 기록에서 남일도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임꺽정』의 작가로 기억되지만 그의 민족주의적 사상의 기저에는 대종교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뒤 북한에 잔류하여 내각 부수상까지 올랐다. 북한정부 수립에 기여한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애국열사릉에 '동지'라는 칭호로 잠들어 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 교조가 순교할 때 직접 시봉했던 대종교인이었다. 단순한 배석이 아니었다.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 봉심을 위해 수행한 여섯 명의 시자(侍子) 가운데 그가 수석 시자였다. 대종교 중광 직후인 1909년에 입교하여 1911년 지교 교질을 받았는데, 당시 같은 교질을 받은 23명 전원이 교단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1921년 임시정부 수립 3주년 개천절 경축식에서 단군 건국 기념일의 역사를 직접 연설했고, 이 내용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한글학자로서 한글 보급에 헌신하다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올랐으나, 1958년 연안파 숙청으로 사라졌다. 그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에서도 지워지고, 대한민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그는 아직 어딘가에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로는 김의한을 비롯하여 안재홍·정인보·원세훈·박열·명제세·김상덕·장연송·장현식 등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납북되었지만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다만,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에서 부의장까지 지낸 김약수는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던 김원봉과 김두봉 등은 연안파로 분류되어 1958년 숙청되었는데, 그들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3년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시 룡성구역에 '재북인사의 묘'가 조성되었고, 2004년부터 신미리와 룡성구역 등에 흩어져 있던 묘를 이장해 현재 62기가 안치되어 있다. 초대 국회의원 16명, 2대 국회의원 18명, 문학인, 역사학자, 사회인사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이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박명진의 『대종교독립운동사』가 남일도본사 명단에 직접 기재한 대종교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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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동제사 활동을 하고 연희전문에서 국학을 가르친 학자로, 박명진의 기록에서 남일도본사 명단에 이름이 있다. 그는 대종교의 비밀결사체 귀일당에도 관여했으며, 1928년 대종교 중광 20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중광절과 조선'이라는 주제로 직접 연단에 섰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매년 국경일마다 불리우는 삼일절-광복절-제헌절-개천절 노래의 가사가 그의 작품이다. 1947년 대종교가 설립한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그 정인보가 1950년 7월 31일 납북되어 그해 사망했다. 독립장(1990).


<안재홍>. 박명진의 기록에서 남일도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가족에 따르면 그는 매일 아침 국조 단군께 기도를 드리며 통일을 염원했다. 미군정 시절에는 백낙준과 함께 '홍익인간'을 대한민국 교육이념으로 제안해 제정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49년 4월에는 대종교인 조소앙과 함께 강화도 마니산 단군 성적을 직접 답사하고 "단군의 거룩한 유적은 3천만 민족의 등촉"이라는 말을 남겼다. 1950년 9월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숨을 거뒀다. 대통령장(1989).


<명제세>. 박명진의 기록에서 남일도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임시정부와 신간회에서 활동했으며, 1950년 5월 정교(正敎)로 승질되어 교단 활동을 이어가던 중 그해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었다. 1964년 1월 4일 사망. 독립장(1990).


이 묘역에는 원세훈·박열·김상덕·장연송·김의한·장현식 등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또한 국내에서 친일파로 분류된 이광수·백관수·양재하·김용무의 유해도 이곳에 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같은 땅에 나란히 누운 이 묘역은,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불균등하게 정리되어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북한 땅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 중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인사는 모두 25명이다.

혁명열사릉에 2명, 애국열사릉의 반일애국지사와 애국지사에 12명, 재북인사의 묘에 9명, 그리고 양세봉 1명이다. 반면 서훈을 받지 못한 채 같은 땅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다. 이극로·홍명희·허헌·백남운·이영·박문규·이만규 등 7명은 독립운동의 이력이 명백하지만 월북을 이유로 서훈 대상 밖이다. 그리고 64위의 항일혁명렬사들 - 1930년대 북간도 일대에서 반일인민유격대, 항일유격대 등에서 싸웠던 인물들- 은 김일성의 빨치산 노선과 연결된다는 이유로 아직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법 제4조 2항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를 애국지사로 규정한다. 기준은 해방 이전의 공적이다. 그러나 법 조항이 명확하다고 해서 문제가 단순하지는 않다. 국가보훈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박민식 전 보훈부 장관은 2023년 "북한 정권 수립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자, 북한 정권의 고위급 자리에 올라간 자는 서훈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항일운동을 했다고 무조건 OK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설이 아니라 북한 김일성 정권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받아들일 대한민국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이극로·홍명희는 배제 대상이다.


이극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지냈고, 홍명희는 북한 내각 부수상을 역임하며 한국전쟁 중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전 체제에 직접 복무했다. 1952년에는 관영 매체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행적들은 단순히 '해방 후 북쪽에 있었다'는 차원을 넘는다. 이것이 국민 감정상 서훈에 강한 저항이 생기는 현실적 이유다.


그러나 이 기준은 법에 명시된 것이 아니라 행정적 판단이다. 상훈법 제11조가 근거로 활용되지만 이 조항은 원래 독립운동가 배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1948년 이후 북한 정권 참여를 동일한 잣대로 묶는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정교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납북 후 끝까지 협력을 거부하다 사망한 조완구도 북한 땅에 묻혀 있고, 서훈을 받았다. 월북자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행적의 성격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 현재 정부의 공식 논리다.


결국 이 문제는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 공적과 해방 이후의 정치적 행적을 어디서 끊느냐의 문제다. 법이 정한 기준선은 1945년 8월 14일이다. 그 기준선을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 그 이후의 행적까지 함께 심사할 것인지는 역사 판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느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정산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다.


평양 신미리의 묘역에 잠들어 있는 이름들.

그들 중 많은 이가 이미 남한의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나마 모셔져 있다. 분단의 비극이다.

북한 땅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문제는 통일을 기다릴 일이 아니다. 남북이 공유하는 항일의 기억, 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뿌리, 그 언어로 소통의 문을 두드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가족들 품으로 모셔오는 일은 언제가 됐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당장이 어렵다면 최소한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애국열사릉에 잠든 독립운동가들의 생몰년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백과사전에 생몰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거나, 미상으로 처리된 채 방치된 이름들이 있다. 묘비에 새겨진 날짜가 가장 정확한 기록일 수 있는데도, 그것을 확인하려는 노력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해 봉환이 정치의 문제라면, 생몰년을 바로잡는 일은 의지의 문제다. 이름 하나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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