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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Jul 04. 2024

죽음에 관한 글

언젠가는 그것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

아직은 제대로 마주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바로 '죽음'.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세상이 그냥 아름답게만 보였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단어와 조우했다. 이웃집도 아니고 뉴스의 기사도 아닌 나의 전부였던 엄마의 죽음. 열네 살의 여름. 내 세상은 종료되었다. 삶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본다면 엄마가 죽기 전과 후로 나뉠 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대중목욕탕의 냉탕은 두려움이다. 들어갈 때 발끝부터 천천히 담그면서 몸을 적응시키고 들어가는데도 그 차가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나에게 엄마의 죽음은 그런 과정도 없이 얼음이 가득 찬 냉탕에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차갑다 못해 무감각해지는 느낌. 차가움이 뭔지 알 수도 없이 그것과 내가 하나 되는 느낌. 나는 죽음을 그렇게 만나야 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남들보다 먼저 만나야했다. 아빠의 죽음. 성인이 되어 만나는 죽음은 아픔과 슬픔 그 자체였다. 무감각했던 어린 시절의 죽음과 달리 모든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유일하게 남은 부모에 대한 상실의 슬픔, 만나기 싫은 것을 또 만난 원망과 분노, 안타까움, 측은함, 미안함, 회한, 두려움까지. 모두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감정에 휩싸였다. 냉탕의 차가움을 온전히 느낀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죽음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내가 겪지 않았으니까. 내가 가진 건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사랑하는 이의 삶이 끝나는 걸 바라봐야 하는 고통과 소중한 것의 상실에 대한 슬픔이다. 죽음이 뭔지 지켜봤고, 인간은 결국 저렇게 죽는거라는 걸 선명히 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간접적으로는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나의 마음을 아직 알지 못한다.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죽음에 대한 나의 마음을 알고 싶다. 죽음의 목격을 통해 나는 무엇을 느꼈고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죽음이 있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이다.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해 정면 돌파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쓰다가도 선회하게 된다.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면 멈칫거린다. 뇌가 간섭한다. 이런 걸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는 내면의 검열관이라고 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겠어."

"왜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죽음 레파토리 이제 지겹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너무 두려워."


죽음과 밀접해진 나와 그렇게 살기 싫어하는 내가 있다. 두 죽음을 겪으면서 경험했던 나의 것들을 온전히 대면하고 꺼내어보고 싶은데 아직은 자신이 없다. 내 안에 어떤 마음들이 있는지 몰라서 접촉되지 않았던 것에 손을 댔다가 내가 다칠까 봐 두렵다. 잘못된 버튼을 눌러 마음이 터져버리고 수습되지 못할까 봐 두렵다. 무얼 느꼈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마주하기 두려우니 죽음에 관한 글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있다.


투병생활을 곁에서 돕는 동안의 마음들, 수없이 들락거렸던 병원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 호스피스의 삶과 임종, 그 이후의 삶까지. 분명 안에서는 거대한 것들이 휘몰아치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합리화한다. 직접 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런 글들 곁을 맴돈다. 폴 칼라니티의 『바람이 숨결될 때』를 읽거나 김진명 선생님의 『아침의 피아노』의 문장만 곱씹으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죽음'이라는 두 단어와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래도록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이라는 글자와 친해져 버렸다. 그렇다고 원망하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이미 나는 그런 삶을 살았으니까. 나는 안다. 죽음이 내게 안겨준 것이 많다는 것을. 죽음 덕분에 내 삶을 더 잘 살아내려고 애썼고, 죽음을 알아서 지금 이 순간에 더 깨어있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죽음 덕에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돌아볼 수 있었고, 죽음 때문에 나라는 건 무엇인지, 삶이라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 고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 양분이 되었다.


태어났다면 동시에 갖게 되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우리는 자꾸 회피한다. 이미 있는 진실을 없는 것처럼 속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삶을 잘 사는 자세다. 모두가 기피하는 죽음. 하지만 모두에게 있는 죽음. 언젠가는 '죽음'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다. 우리의 오롯한 진실에 대하여. 그것을 통한 우리의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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