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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Oct 02. 2024

마음의 추

기울어지는 마음의 방향에 대하여

내 마음의 추가 삶으로 가득 기울어지면 어느새 슬그머니 우울감이 찾아온다. 너무 애썼다는 증거고, 나를 잃어버렸다는 표시다.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도 '잘' 살아가려는 노력의 양이 늘어나면 이런 사태가 생긴다. 내어줄 마음의 여분이 없을 때, 세상을 향한 화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다. 그건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오늘의 마음은 혼자 있는 것으로 추를 기울인다. 이럴 땐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것보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이 좋다.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엄마나 부인, 언니와 친구 등 내가 가진 수많은 역할 중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세상으로 나를 허락해야 한다.


한 시간을 걸어 바다를 보는 것으로 선택한다. 걷다 보니 바다가 나왔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 속으로 도망쳤을 뿐이고, 그러다 당도한 곳이 바다니까. 이곳에서는 해야 할 일도 나누어야 할 말도 없다. 자유로움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한 나로 돌아간다. 이러한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일이다. 철썩이는 파도와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거품을 보며 지금, 이 감정도 어차피 사라질 것임을 안다. 아무리 성난 파도도 잔잔한 파도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안다. 밀려왔다 다시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에서 허무함과 채워짐을 동시에 느낀다. 


엄마와 함께 모래놀이하며 깔깔깔 웃는 아이, 남자 친구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미소 짓는 여자, 커다란 서프보드를 안고서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남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와 무관하기에 자유롭다. 같은 장면 속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우리는 철저히 개별적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어딘가로부터 왔기에 태생부터 안고 있는 근원적 외로움이 있다. 절대 나 아니고선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숙명적 존재들이기에 갖는 슬픔과 고독이 있다. 혼자가 되는 것에 마음이 기운다는 건 나와 긴밀히 만나야 한다는 신호다.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생의 숙제를 고요히 풀어 가본다.


나에게 붙은 수식어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그저 '있는 나'로서 존재하는 기쁨과 자유를 느껴본다. 이제야 조금씩 가슴이 열린다. 공허했던 마음이 다시 채워진다. 비로소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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