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의 세계

우리의 유일한 여름을 향하여

by 밝음

하나뿐인 혈육인 나의 여동생은 주재원 남편을 따라서 보스턴에서 살고 있다. 주재원으로 약속된 거주 기간 총 4년 중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고 내년 봄이면 발령 기간이 끝날 예정이다. 동생네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한 번쯤은 우리 가족도 그곳에 여행을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온 가족이 시간과 돈을 들여 지구 반대편이라는 먼 거리에 여행을 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현실 생활에 치여 내내 미국 여행에 대한 바람을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해를 남기고서야 다른 것들을 뒷전으로 미루고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겼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즉흥적인 편이라 남편도 나도 대부분의 인생을 무계획으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인생의 목표와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갈 거라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지 않고 살다가 덜컥 결정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보스턴은 한국과 시간 차이가 13시간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나라다. 가고 싶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더군다나 가족들과 다 함께 가는 여행은 여러 각오와 포기를 해야 하기도 했다. 사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가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세상의 웬만한 일들은 모두 100%의 가능성이 아니라 49% 대 51%의 가능성으로 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하게 될 수도 있다. 완벽한 준비가 없어도 못 갈 확률보다 갈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있다면 가보는 것이다. 어떤 일을 더 빨리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더 좋음과 더 나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니 시기와 상관없이 ‘했다’와 ‘하지 않았다’의 차이만으로 놓고 본다면 완벽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완벽한 성공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니었는데 여행 날짜를 결정하고 나서 보니 출발 날짜가 아이들 방학식이었고,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 때마침 김해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서 한 시간 뒤 바로 직항으로 갈 수 있는 항공기도 있었다.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말해주는 삶의 이정표들을 만나며 우리 가족의 미국 한달살이가 시작되었다.


부산을 떠나는 여행 첫날에는 비가 내렸다. 남편과 나는 집을 챙기느라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밤을 보내고 초등학교 6학년, 3학년 두 아이를 새벽 3시에 깨워 옷을 입히고 집을 나섰다. 공항 국제선에 도착했더니 아직 문도 열리지 않았다.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이르게 도착한 덕분에 탑승 수속을 빨리할 수 있었다. 우리의 출국 절차를 도와주신 분은 항공사 직원분들 중에서 가장 밝은 표정을 하고 계셨다. 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직원이셨는데 매일 이렇게 이른 새벽 출근을 해서 많은 사람의 탑승을 돕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데 미소를 잃지 않고 하시는 모습에 감탄했다. 아침의 시작이 하루를 견인하듯, 우리의 40일을 직원분 덕분에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고 무사히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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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 15시간이라는 비행시간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시차를 미리 극복하려고 전날 잠을 거의 자지 않았던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 우리 가족은 모두 삼십 분 정도의 쪽잠 외에는 가는 내내 기내 앞좌석에 붙어 있는 TV와 친구를 맺고 동행했다. 집에 TV가 없는 우리 가족은 모두 동시에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한 듯 빠르게 화면에 빨려 들었다. 그런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역시 우리 가족은 TV 중독자 되기 딱 좋은 사람들이야. 없는 게 나아’



우리는 무사히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결국 진짜 먼 미국에 왔구나’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영어를 할 줄 모른다. 동생이 미리 보내 준 예상 질문을 보며 더듬더듬 연습했다. 미국엔 왜 온 거냐, 몇 번째 방문이냐, 어디에서 얼마큼 머물 거냐, 등의 몇 가지 질문에 짧은 단어로 대답했다. 수능 이후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은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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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입국심사를 끝내고 재빨리 게이트로 달려갔다. 동생 J와 조카 K가 우리를 마중 나와 주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 와서 기댈 누군가가 있다는 건 큰 힘이다. 캐리어 네 개와 짐가방 세 개를 모두 차 트렁크 가득 싣고 한 달 동안 함께 머물게 될 동생의 집으로 향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따로 에어비앤비를 구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다른 가족과 한 달을 붙어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나와 동생은 성격이 안 맞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싸우며 자란 건 아닌데 기호와 성향이 달라서 같은 집에서 살아도 친하게 지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한 번 부딪히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쟤다.’라는 걸 확인했다.


이 세상 모든 자매는 그런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한다. 소중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극도로 싫기도 한 존재. 가까이에서 자라오면서 그 사람의 온갖 단점을 다 알고 있으며 편안한 내 집에서 나를 긁는 단 한 명의 사람. 그게 바로 자매다. 차라리 더 많은 형제, 자매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종종 했다. 어차피 얘도 이상하고, 쟤도 이상하고, 모든 인간은 다 그렇구나, 하면서 타협하며 살았을 텐데 내 옆에는 단 한 사람만 있고 싫어할 사람도 단 한 사람이니 괜히 멀쩡한 동생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애로 만들어야 하는 숙명에 처한다. 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있지만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같은 처지의 수평적인 관계이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사이에서는 못 볼 꼴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법이다. 그러니 서로는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애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따로 숙식할 장소를 구하려면 가장 걸리는 건 솔직히 돈이다. 그리고 멀리 미국까지 왔는데 다른 집에 서로 떨어져 생활한다면 얼마큼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을까 싶어서 좀 티격태격하는 날이 생기더라도 같이 지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동생도 제부도 기꺼이 방 한 칸을 내주었고 7명이 다 같이 있어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함께 지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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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15분 정도 달리고 다시 일반 도로를 15분 정도 달리니 마을이 나타났다. 이곳엔 고층 빌딩이 하나도 없다. 모두 2, 3층 건물의 빌라형 집이거나 마치 빨간 머리 앤이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 것 같은 단독 주택이 가득하다. 집보다는 나무가 더 많은 곳이었는데 우리나라의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키가 크고 허리둘레가 굵은 나무들이 가득하다. 나무들 대부분이 아파트 15층 높이만큼 솟아 있다.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살 집이 우선이고 그 주변을 나무들이 채워주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사람보다 자연이 주인공 같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하늘도 환하고 넓다. 다른 건 몰라도 한 달 동안 하늘 구경은 실컷 하고 가겠구나 싶다.

보스턴 날씨는 더운 여름이지만 맑고 청량하다. 햇볕은 따가운데 바람은 시원하다. 가을이 되면 네 시부터 깜깜한 밤이고 겨울에는 지독하게 긴 추위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지금인 여름은 절정을 달리고 있다. 기억 속 유일한 여름이 될 것 같았다. 덥고 습한 게 여름이라는 나의 정의를 새롭게 바꿔 줄 이곳은 화창하고 상쾌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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