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민족에게는 힘든 미국 살이
나의 현재 본업은 전업 주부다. 그렇다고 특별히 집안일을 잘하거나 즐기는 건 절대 아니다. 우리 집과 가족의 형편과 상황에 그리고 우리 부부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아직은 내가 전업 주부로 사는 게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우리나라는 장보고 밥해 먹기 쉬운 나라다.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을 어디 가든 쉽게 찾을 수 있고 웬만한 식재료는 배달로 당일 또는 다음 날에 쉽게 내 집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키트나 반찬 가게도 무수히 많고 그것조차 하기 싫으면 외식이나 배달을 시켜 먹으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도 ‘밥’이라는 건 나에게 늘 골칫거리고 할 일이자 숙제다. 일단 음식을 해 먹는데 즐거움을 못 느끼는 편이고 메뉴를 고민하는 것조차 에너지 쓰이는 일이라서 그냥 아무거나 먹고 마는 게 더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혼자 살면 아무거나 먹고 때울 텐데 집에는 한창 자라는 어린이가 둘이나 있고 내 주 업무는 집안일이니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입맛과 취향이 다른 네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그리고 질리지 않게 음식을 만들어 준비하는 일은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나이기에 미국 한달살이에서 가장 큰 난제는 언어보다 ‘밥’이다. 잠깐 여행객으로 온 게 아니라 동생네에서 40일이나 같이 생활하려고 왔으니, 평소처럼 밥을 해 먹어야 한다. 동생 말로는 미국에서의 주재원 생활은 장보고 밥해 먹는 게 주요 일과라고 한다. 높은 물가에 매일 외식하기도 어렵고 한국처럼 배달이 쉽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남편 출근용과 아이 등교용 도시락까지 매일 싸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마트 가는 건 가장 중요한 일이고 가장 첫 번째 할 일인 셈이다. 우리는 그 생활을 똑같이 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고.
부산에서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뜬눈으로 밤새고 난 후라 정신이 온전치 못했지만 간단하게 짐만 풀고 끼니 해결을 위해 장을 보러 갔다. 집에서 잠깐 걸어 나가면 로컬 재료를 맨손으로 만지며 살 수 있는 정겨운 시장이 있기를 바랐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환경은 아니었다. 넓은 땅 미국답게 차를 타고 큰길을 다시 15분 정도 나가야 식재료를 살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거의 비슷한 식재료를 파는 우리나라 마트와 달리 미국의 마트는 파는 제품이 조금씩 달라서 때마다 필요에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우리는 Costco에 한 번 들려서 대용량 재료를 사고, Whole foods에 가서 나머지 단품 재료를 샀다. 미국에 있는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갔던 곳이 마트다. 첫날에 갔던 두 곳 외에도 Trader Joe’s, Wegmans, Star market, H mart까지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마트에 갔다. 장 보러 돌아다니기만 해도 따로 운동이 없을 것 같았다. 장 보느라 힘이 빠져서 운동할 힘이 없어지는 게 현실일지도 모르겠지만.
물이며 생필품이며 사람들은 커다란 쇼핑 카트를 가득 채우고 마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많은 양의 제품을 고르는 것도 일이지만 집으로 나르는 건 더 큰 일 같아 보이는데 이런 일이 그냥 매일 하는 평범한 일상이라니, 머리가 저절로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그러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배달 문화에 갑자기 한없는 감사를 느꼈다. 땅이 좁다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한 배달일 테니 작은 나라라서 얻는 이득도 있는 셈이다. 미국 사람들처럼 매일 이렇게 장을 봐야 한다면 나는 귀찮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자발적 미니멀리스트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덜 쓰고 덜 먹는 걸 선택하지 않을까. 쾌속 배달에 익숙해지는 건 무서운 일이다.
그래도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좋았던 부분은 당근, 호박, 오이 같은 식재료를 살 때였다. 모두 포장 없이 자기 몸 온전한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고, 필요한 재료를 옆에 있는 종이봉투에 담아서 가져가는 방식이어서 좋았다. 평소에 주요 먹거리의 70%는 조합 형태의 친환경 가게에서 사는데 유기농 제품이라도 하나씩 진공포장이나 비닐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재료는 거의 없다. 아무래도 신선도와 보존의 이유로 그렇겠지만 가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먹기 위해 사는 순간 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늘어나는 아이러니를 여기서는 조금 덜 겪을 수 있어서 그건 좋은 일이었다. 필요한 개수만큼만 가져가는 것도 좋고.
마트를 다니면서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만났는데 바로 ‘에티켓’이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해내야 하는 입국심사가 우리의 첫 관문이었다면, 마트는 우리의 두 번째 관문이었다. 마트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동생이 말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랑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 해야 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기본 문화라고 했다. 이리저리 사람들에 치이고 잘못해서 쇼핑 카트끼리 부딪치기도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다른 사람과 접촉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스트레스가 일어났다. 이 나라의 사회 특징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서로 피해를 주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지. 그들의 자유에는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책임과 통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마트에서 장을 보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수없이 많은 ‘Excuse me’와 ‘sorry’를 들을 수 있었다. 앞에 사람이 있으면 틈을 제치고 지나가지 않고 당연한 듯 기다리고 있으며, 길을 막았거나 부딪힐 뻔하기만 해도 그들은 바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적응되지 않는 이 분위기를 우리는 즐겨야 하는 여행자다. 아마도 마트에 가는 게 익숙해지고 마트에서 편안히 돌아다닐 수 있을 때쯤이면 집에 가는 날이 코 앞이겠지. 이 불편함조차 그리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