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단 뛰기로 했습니다.

보스턴에 갔으면 러너가 되어야지

by 밝음

보스턴에 가기 전에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달리기’. 마흔을 넘기면서 몸이 전보다 무거워진 게 느껴졌다. 애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전에 비해 활동량은 줄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대사량은 떨어지니 살이 당연한 듯 불었다. 매일 달리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늘 그렇듯 생각과 몸은 별개고 마음을 먹고 나갔다가도 쉽게 포기했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니 힘들고 재미도 없어서 몇 분 뛰다가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런데 여기 보스턴이라는 곳은 국제 마라톤으로 유명한 장소가 아닌가! 꽤 잘하는 러너들도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해 보는 게 꿈이라고 하던데. 오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도시니만큼 그 기운을 받아서 잘 달리지는 못해도 매일 달리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보스턴에 머무는 동안만은 늘 다짐만 하고 실패했던 러너의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미국으로 여행을 오긴 했지만, 최대한 집에서의 일상과 비슷한 리듬으로 사는 게 우리 가족이 세운 목표였다. 그래서 늘 그랬던 대로 다음 날 아침 6시에 눈을 떠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만의 리추얼 시간을 보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이들 등교 준비를 위해 썼던 시간을 동생과 함께 달리는 시간으로 대체한 것이다. 나도 동생도 달리기 초보라서 매일 15분 달리기를 목표로 잡았다. 그마저도 달리다 걷기를 반복해야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달리고 있다는 느낌 자체가 좋았다.



거리에는 아침부터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달리기는 그들 삶의 일부이자 일상이었다. 달리기의 성지답게 보스턴에 가면 실제로 곳곳에서 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시간을 불문하고 이 거리 저 거리 가리지 않고 뛰는 사람들이 있다. 뛸 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은 모든 곳이 뛰기 좋은 곳이다. 커다란 지프차가 다녀도 남는 넓이의 차선이 있고 그 옆에 자전거 전용 도로까지 있는데도 도보는 트랙처럼 넓게 남아있다. 어딜 가든 계속 뛸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셈이다. 게다가 공원 하나도 크기가 어마어마하니 같은 트랙을 여러 번 돌아야 하는 번거로움이나 지겨움 없이 바뀌는 풍경을 감상하며 즐겁게 뛸 수 있다. 달리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시가 바로 보스턴이다.



동생네가 있는 곳의 정확한 명칭은 보스턴 바로 옆인 ‘브루클라인(Brookline)’이다. 보스턴은 미국 50개의 주중에 매사추세츠주의 중심에 있고 주 안에는 작은 도시들이 많다. 브루클라인도 그중 하나다. 동생과 함께 달리면서 마을 곳곳을 구경했다.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도 온통 아파트인 곳에 살다가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봐도 온통 주택뿐인 이곳에 있으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전체적인 형태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모습과 개성을 가진 집들이었다. 남해 미국 마을에 여행 갔을 때 비슷한 집들을 보았는데 눈에 보이는 풍경이 어색해서 마치 어느 펜션 촌에 와있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사는 동네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가게가 없다는 점이다. 아파트 상가 하나에도 수많은 가게와 학원이 즐비한 우리나라와 달리 이 마을은 오직 집과 나무뿐이다. 집 다음 집, 그리고 다시 집.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을 두고 비슷한 듯 다른 모양으로 놓여 진 집들을 보며 영화 속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동네여서 헬러윈 축제가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헬러윈 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탕과 초콜릿을 준비해 두고 아이들을 기다린다고 한다. 조카가 헬러윈 때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너무 즐거워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즐거움은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최고의 날이지 않을까 싶다. 조건 없이 누구에게나 환대받고 맛있는 간식을 받을 수 있는 날이라니. 나 같은 아이는 아마도 일 년 내내 기다릴 수도 있을 만한 날이다.


지금은 공교육을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대안학교에 다닐 때 친한 부모들과 딱 한 번 헬러윈을 즐긴 적이 있다. 비록 모두 다 아파트에 살았지만 열 가정 정도의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아이들에게 줄 초콜릿과 사탕을 준비했다. 아이들 모두 각자 헬러윈 분장을 한 뒤 아파트 상가에 모였다가 행진하듯 약속 해둔 집들을 방문하며 축제를 즐겼다. 간식도 가득 받고 사진도 찍고 중간에 모르는 동네 친구도 끼고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우리끼리 놀아도 즐거웠던 시간인데 동네 전체가 다 함께 헬러윈을 즐기는 경험은 특별한 기억이 될 것 같다.



집들이 줄지어 선 골목을 달리다 보니 학교가 나왔다. 이 동네에서 집 외에 볼 수 있는 다른 건물은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과 학교뿐이었다. 조카가 다니는 학교였는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 초등에서 중등 과정까지 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한국 학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별도의 교문이 없는 것이었다. 달리며 지나가는 길 바로 옆에 학교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다. 학교라지만 별도의 교문과 커다란 운동장을 지나야 나오는 게 아니라 동네의 다른 집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점은 건물 벽면에는 학교 이름만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교에 가면 늘 간판처럼 커다란 학교 이름과 함께 ‘슬기롭고 창의적인’, ‘미래 인재 양성’ 같은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다. 늘 보던 글귀라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곳 학교를 보며 교훈이라는 좋은 취지가 어쩌면 아이들의 미래를 어른들이 결정 해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지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청설모들을 만났다. 길을 건너는 청설모, 나무를 오르는 청설모, 친구와 노는 청설모. 이곳은 청설모 천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를 흔히 볼 수 있듯이 이곳은 길에서 청설모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청설모를 보려면 깊은 산속에는 들어가야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길 위를 뛰어노는 청설모를 보니 어색하고 신기했다. 보스턴에서는 청설모 외에도 길거리와 공원에서 캐나다 구스, 칠면조, 토끼 같은 동물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턴에서 달리며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인사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내 갈 길 가는 것처럼 달리지만 이곳에서는 거리를 뛰다가 상대방과 눈이 마주치면 모르는 사이더라도 ‘Hello’, ‘Good morning’ 이렇게 인사를 한다. 당연히 뛸 때뿐만 아니다. 거리를 걸어가도 대중교통을 타도 인사가 기본이다. 모르는 사이지만 사람과의 환대와 연결이 되는 인사는 꽤 즐거운 일이고 서로를 기분 좋게 만들지만, 내향인인 나에게는 낯설고 어색한 행위였다. 그래서 달릴 때도 걸을 때도 소심하게 최대한 땅만 보고 갔다. 인사 문화도 오래 살다 보면 익숙해질지 모르겠지만 잠깐 방문한 여행자인 나에겐 어려운 일이다.

보스턴에 있는 동안 달리는 게 좋아지면 좋겠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거나 러닝 동호회에 가입할 마음은 없지만,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달리는 게 싫지 않은 정도의 가벼운 일상 러너가 되면 좋겠다. 보스턴의 기운을 받아서 내일도 일단 뛰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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