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름다운 노력으로 만든 소중한 인연
"너도 전학 왔어?"
"응, 9월에 이사 왔어."
"나도 이번에 이사 왔어."
나보다 키가 10cm는 더 커 보이는 여자 아이가 말을 걸었다. 전학생이었던 나는 또 다른 전학생이었던 J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전학생'이라는 공통분모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동네에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학교로 전학생이 많아지는 시기였다. 5년 하고도 절반의 해를 다른 친구들과 오래도록 보내다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히 동시다발적 전학생들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적응을 돕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질감을 가진 존재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꽤 든든한 힘이 생겼다. 그런데 J와 나는 다른 아파트에 살았다. 동네에 여러 아파트들이 동시에 지어졌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긴 했지만 다른 아파트에 사는 전학생이었던 것이다.
J는 자신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다른 전학생과도 친구를 맺고 있었다. 그게 바로 H였다.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접근성 때문에 H는 빠른 속도로 J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J를 통해 H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질투인지 기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잘 모르는 H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H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J와 함께 있는 서로를 볼 때마다 우리는 눈길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아파트를 가로질러 문구점에 가는 길이었다. 단지 중간쯤을 지나는데 놀이터에 다른 친구와 함께 있는 H를 보았다. 2:2 상황에서 눈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를 흘겨보며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상대가 내 목소리를 듣기를 바라는 불순한 마음이 가득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쫓아오지 못할 정도의 거리에서 하는 것이다. 가는 길을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들리게 한다. 상대방도 똑같은 목적으로 같은 시추에이션을 벌인다.
"뭐 쳐다보노"
"뭔데 재수 없게"
그게 나와 H의 첫 공식 대면이었다. 겨우 6학년이었던 우리들. 지금 생각해 보면 쪼꼬만 것들이 웃기는 짓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마음이 생기는 시기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이 되면 특히 여자아이들은 무리를 짓고 편을 나누려고 하는 게 발달의 한 특성이란다. 아동 발달에 대해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는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J와 친한 H였고, J와 친한 나였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어느새 셋은 함께 노는 친구가 되었다. 삼총사가 결성된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은 한 번 적군은 영원한 적군이 되기 쉽지만, 어린이들에게 적군이 아군이 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손익을 따지는 것보다는 함께 노는 게 좋은 나이니까.
운 좋게 우리 셋은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서로 다른 반이 되었는데도 우정은 지속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다른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흩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했다. 매일 만날 수는 없어도 마음은 늘 곁에 있었다. 곁에 새로운 친구들이 늘어갔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삼총사에 대해 말했다. 취직하고 서로 다른 지역에 살기도 했었고,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여전히 독신으로 사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베스트 삼총사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 다른 곳이나 다른 모습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 우정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옅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30년 가까이 여전한 사이를 유지하는 우리들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더 오래된 친구가 있긴 하지만 알게 된 길이가 길다고 해서 우정의 깊이도 깊은 건 아니다. 함께 한 시간과 더불어 나눈 마음의 양도 많았기에 우리의 우정은 자연스럽게 묵은 사랑인 된 것이다.
힘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들, 안 좋은 일을 겪었다면 같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한 친구들, 좋은 일 생기면 진심으로 기꺼이 축하해 줄 수 있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건 인생의 큰 자산이다. 가족 외에도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내 마음을 진심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큰 기쁨과 행복이 된다. 조건 없는 이해와 사랑만큼 인간에게 더 큰 힘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우연히 맺어진 만남이었지만,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만들어간 만남이다. 셋 모두의 애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이 가능했다. 누구 하나 마음을 놓았다면 지금의 관계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집착도 아니었다. 시간과 마음을 나누다 보니 소중해졌고, 소중했기에 귀하게 여겼을 뿐이다. 친하다고 함부로 여기지 않았고 만남의 횟수나 거리에 상관없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오랜 인연은 마음의 부지런하고 따뜻한 노력의 증거물이다. 한 사람만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유지될 수 없는 쌍방의 균형적 노력. 그러니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때의 내가 아니라, 전체의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인연들.
찰나의 시절이 아니라, 굴곡의 시절 모두를 함께 한 인연들.
우리의 아름다운 노력이 만든 소중한 인연이다.
오늘은 삼총사 단톡방에 글을 투척해야겠다.
"뭐하노 이것들아, 이번 주 쉬는 날에 브런치 먹자."
이것은 경상도여자식의 '보고 싶다. 사랑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