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라는 다정한 인사말

내 눈에 담은 당신에게 건네는 고백입니다.

by 밝음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은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알려주는 일에 가까웠다.

-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어릴 적,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늘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야! 넌 그대로다."


'그대로'라는 말은 늘 나를 불편하게 했다.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진 내가 되고 싶은데 왜 나는 남들 눈에 그대로일까.'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떤 마음으로 건네는 인사인지도 모르면서 그 인사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느 날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코흘리개적 동창도 모임 자리에서 지나가듯 말을 건넸다. "너는 할머니가 돼도 알아보겠다."라고. 그 말이 "너는 영원히 그대로일 것 같아."라는 말로 들려서 나는 또 불쾌의 강에 빠져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했던 친구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 아이가 맞는지 앨범을 뒤져서 일치시켜봐야 할 정도로 의심스럽게 달라져있었다. 키와 외모, 성격까지도 달라진 것 같았다. 나를 놀랠 만큼 달라진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겨울방학만 지나면 친구들은 기본 5cm씩 자라왔다. 어떤 녀석들은 10cm까지도 자라왔다. 대체 방학 동안 뭘 먹고살았길래 겨우 한 달 만에 저렇게 변한 건지 늘 궁금했었다. 신기하게도 키가 훌쩍 자라니 얼굴 느낌도 변해있었다. 진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보였다. 그런 친구들에 반해 나는 겨우 1cm 자랄까 말까 했다. 내가 자라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자랐다. 나도 남도 모르게 조용히 자라나는 나였다.


나는 성장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영원히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믿는다. 나의 키는 6학년 그 시절에 머물렀다. 하지만 키는 내가 아니다. 비록 육체는 성장은커녕 이제 퇴화로 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라는 존재는 끝도 없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그대로네.'라고 하는 말이 좋은 뉘앙스의 말이라는 걸 안다. 외적인 면을 보고 건넨 그 첫인사는 '나이 들어도 늙지 않네.'라는 말이었다. 늙어도 상관없으니 머무르는 게 싫은 나였다. 건강히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여전히 마음의 길이가 1cm씩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우주의 크기가 무한하듯 내 마음의 길이도 무한하다고 믿으며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그 키를 오늘도 조용히 키워내며 지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아니까. 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얼마만큼 자랐는지 나만은 오롯이 안다. 비록 세상의 눈에 뜨일 만큼 폭풍 성장을 하지 않는 나이지만 조용히 조용히 정진하듯 성장하는 이런 내가 좋다.


단 한순간도 나는 그대로였던 적이 없다. 오늘도 나는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에게 "그대로네."라는 말을 건넨다면, 지금의 내가 어떤 나인지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과거의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여기고 싶다.



그대로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당신에게 눈길을 주었었음을.
지금의 당신에게도 관심을 주고 있음을.
서로에게 알리는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고백에 가까웠다.

- 김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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