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슬픈 가을

나에게 가을은 아빠다.

by 밝음

지는 것들은 슬픈 것일까

지는 것들은 아름다운 것일까


왜 가을은 애매한 가운데에 서서

애매하게 왔다 갈까

애매하게 환희와 슬픔을 간직하고

애매하게 아름답고 서늘할까


울긋불긋 세상을 가득 채우고서는

형형색색의 빛으로 모든 마음을 빼앗고서는

그것들에 한껏 취해있을 때

보란 듯이 우수수 자신을 떨어트려버린다.


여름의 푸르름도, 가을의 아름다움도

모두 자신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것까지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매년 알리고 있다.


모든 건 결국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건 모두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가을을 통해 배운다.




가을만 되면 아빠 생각이 난다. 대학교 1학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 시기쯤 아빠와 우리는 한집에 살고 있지만 전혀 교류가 없었다. 아빠의 병든 마음은 오직 술만이 그것의 치료제였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집이 조용하기만을 바랐다.


멀쩡할 때는 선비 같은 성격인 아빠가 술만 취하면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 직접 행동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잠도 못 자게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고 주정을 해댔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어도, 독서실에서 쓰는 귀마개를 해도 아빠의 소리는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모든 세상이 잠든 고요한 새벽에는 시계 초침소리도 기침 소리만큼 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인 우리 가족의 병든 삶이었다.




어릴 때 보았던 아빠는 늘 멋진 사람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대기업에 다녀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었다. 주말이 되면 가족들을 데리고 늘 여행을 다니셨다. 축구, 테니스 등 운동을 좋아하는 아빠를 따라다니거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야유회에서 가서 함께 놀았다.


그렇게 멋지던 아빠였는데 엄마가 떠나고 명예퇴직을 하면서 처참히 무너졌다. 무너짐은 일상이 되었고, 무너진 일상은 삶이 되어버렸다. 부모의 역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이 유일한 역할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요즘 뭐 하며 살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의 삶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느낌이었다. 같이 거주만 할 뿐 아빠의 삶은 아빠의 삶,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 각자가 챙겨 살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작은 사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저녁,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와 당연한 듯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 살얼음판 같이 불편한 집에서 유일하게 편히 있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두고 나니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A4용지에 적힌 익숙한 필체와 함께 그 위에 말라 쪼그라든 나뭇잎 몇 장이 보였다.


"딸! 아빠 미안하다. 가을이네. 아빠 선물이다. 사랑해."


난생처음 받아본 아빠의 직접적인 사랑표현에 좋으면서도 낯섦이 몰려왔다. 별스레 그러는 아빠의 행동에 퉁명스럽게 "뭐고! 가을 타나"라며 혼잣말을 하며 넘겼다. 그런데 그 종이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나를 보면 그것도 소중했던 모양이다.




감성적이었던 가을남자인 아빠는 우리를 두고 어느 날 가을, 지구별 여행을 끝내셨다. 그런 타이밍은 어떻게 어떤 계획을 하면 나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빠의 삼일장이 끝나고 장지에 엄마와 함께 모시던 그날은 나의 34살 생일날이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생일 선물. 생일날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 가을날 나를 낳았고, 어느 가을날 다시 돌아갔다.

그래서 가을은 아름다운데 자꾸 슬프다.

너무 화려하게 지니까. 너무 아름다운데 그 순간 사라지니까.


나에게 가을은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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