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내 마음에게
어릴 적 내가 만난 세상은 노란빛이었다. 세상은 따뜻했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고 새로운 것들이 가득했다. 실제 세상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세상은 그러했다. 어차피 실제적인 세상보다는 내가 만들고 느끼는 세상이 중요한 거니까. 내가 느끼는 세상은 나에게 사랑이었고 나는 세상을 사랑했다.
보물상자처럼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문구점이 줄지은 길을 걸어가서 시끌시끌한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것. 매일 똑같은 길을 이용해서 집으로 걸어가지만 어느 날 검은 대문집에 있던 나뭇가지가 삐죽 손을 내밀어 나에게 석류를 선물해 줄 때. 아무것도 없는 좁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함께 우리의 몸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즐거움을 창조할 수 있었던 시간들. 늦은 밤 술 취한 아빠가 잠든 우리를 깨워 회사에서 받아온 48색 색연필과 동그란 외제 쿠키통을 주던 순간들까지도.
나에겐 모두 노란빛이었다. 온통 노란빛이었다. 내 괴로움은 부끄러움이 많아 슈퍼에 가서 과자 가격을 물어보아야 할 때나, 아침 8시에 울리는 윤선생님의 전화를 눈도 뜨지 않고 받으며 영어공부를 해야 할 때 정도였다.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게 누리지 못했던 노란빛의 시간들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이 될 시간들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며 영원히 그런 곳일 줄 알았다. 가위로 싹둑 줄을 자르듯 갑자기 잘려나갈 줄 몰랐던 나의 노란빛. 내 삶의 순수함과 따뜻함의 시기를 지나 노란빛은 갑자기 암전 되었고 나의 세상은 꺼졌다.
내가 같은 곳에 살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불편하고 불쾌하고 침울한 곳이었다. 미움과 한숨, 한탄과 경멸로 가득했다. 빛이 없는 곳. 암흑이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암흑이 되자 나도 암흑이 되어갔다. 사랑 가득한 나는 사라지고 고슴도치보다도 가시가 많은 가슴이 되었다. 누구 하나 건드려봐라는 태세로 차갑게 얼어있었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 있다.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이다. 이 책을 1, 2권 모두 읽어보았지만 자꾸만 제목에 공감이 되지 않고 내면에서 맴도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보다 미워할 용기가 필요해."
맞다. 나는 미움받는 용기는 꽤 많다. 어쩌겠는가 좀 짜증 나기는 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고 내가 노력한다고 그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힘들지는 않았다. 내가 정작 힘들었던 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누군가가 미운데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게 힘들어서 마음 편히 미워하지도 못하고 안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 사람과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라면서 지냈다. 미워하는 내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 뒤로 미워해보겠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래 나도 마음 편히 누군가를 미워할 용기를 가지자고 다짐도 하고 미워하기도 해 보았다. 그 시간을 가지면서 나에 대해 알았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얼마 전 한적한 교외로 여행을 갔었다. 혼자 시골 정취를 즐기겠다고 커피 한잔을 텀블러에 타서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었다. 세상의 평화를 한껏 누리고 있었던 그때 나의 평온을 세차게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다다 하는 여덟 발자국 소리와 함께 월월월월 목청껏 소리치는 개 짖는 소리였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개 두 마리가 순식간에 내 앞까지 와서 날 보고 짖고 있었다. 두 마리 다 목줄이 없었다. 눈에는 뱀눈과 비슷한 초록빛 살기가 느껴졌다. 도망도 가지 못하고 좇지도 못한 채 항복하듯 양팔을 높이 들고 얼음이 되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상상을 했다. 만약 내 다리를 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쪽 발로 걷어차야겠지.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린데 어쩌지. 아 텀블러가 있었지 내리쳐야겠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었다.
"물리는 것보다 개를 때려눕히는 게 더 무서워."
나 자신에게 멍청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마음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물리면 때려눕히기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사실과 판단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미워할 용기가 없는 사람, 공격하는 게 더 두렵고 힘든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살다 보니 내 안에 있던 사랑의 빛이 자꾸 꺼진다. 힘든 일이 생기고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하기에 따뜻한 마음의 빛이 자주 흔들리고 작아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본래 가지고 있는 그 노란빛은 밝고 따뜻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사랑이겠지.
우리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사랑 가득한 내 마음이 변치 않으면 좋겠다.
아프고 외롭고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또다시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사랑이 가득한 내 따뜻한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빛이 곧 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