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것으로 만나는 마음
마음이 밝고 따뜻할 땐 세상이 보였다. 나무에 달린 석류 열매들, 골목 놀이하는 곁을 지켜주는 드높은 해바라기가 보였다. 나를 힐끗 쳐다보다 제 갈길을 가는 강아지도 보였고, 학교 가는 길 참새 방앗간 같은 문구점 안의 학용품들도 보였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아름다움이 가득한 세상이 보였다.
웃으며 우리 간식을 한가득 들고 오는 엄마도 보였고, 피구를 잘해서 멋있어 보이는 우리 반 남자아이도 보였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해 늘 경이로운 일곱 살 많은 사촌언니도 보였다. 나에게 웃어주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 주변을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눈은 밖을 보고 있었다.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나에겐 어둠이 왔다. 감정이 자라는 시기였고 집안에는 우환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빛이 밝으면 그늘도 짙다. 내가 만난 아름다움 만큼 보란 듯이 고통은 커다란 몸집으로 나를 덮쳤다.
마음이 어둡고 차가워지자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보였다. 세상은 어둠이 되었고 그 암흑 속에 겨우 빛을 지키고 있는 듯한 내가 보였다. 작고 연약하고 한없이 힘없는 나만 보였다.
그 불이 꺼질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내가 불을 지켜내는 방법은 오직 그 불을 쳐다보는 방법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물어볼 이 없었고 기댈 수 있는 처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을 떼지 않는 것이 그 불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세상의 불이 모두 꺼진 밤까지 내 작은 방 모니터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6시에는 일어나 학교를 가야 함에도 새벽 3시까지 나만의 불을 밝히는 일을 했었다. 그 시간마저 없으면 내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되는 시간 같았다.
싸이월드에 접속해서 그날의 기분에 끌리는 사진을 한 장 고른다. 사진을 보며 그 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기록했다. 누가 볼 수도 있지만 봐달라고 쓰는 글이 아니었고, 미니홈피라는 나만의 공간에 매일매일 쌓아가는 나를 위한 내 마음의 흔적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마음 시린 날들을 견뎌냈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나의 글을 써내며.
고통이 너무 짙어 생이 원망스럽고 싫어질 땐 자판을 두드리는 것 마저도 불을 지켜낼 수 없었다. 무작정 펜을 들고 일기장을 펼쳤다. 쓰는 것으로 마음을 여미지 않으면 연기처럼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순간들이었다.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는 내 마음을 내가 들여다봐주면서 지켜냈다. 그때 쓰지 않았다면 지금 쓰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으로 나는 나를 위로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었고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이유를 찾게 했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나에게 글쓰기란 그런 것이었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이다. 마음의 날씨가 춥고 시릴 땐 눈처럼 하얀 백지 한 장과 마음에 드는 펜 한 자루를 들고서 나를 마주해 보자. 꾹꾹 눌러 담은 내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 이 추운 겨울을 버텨낼 따뜻한 온기를 만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