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생명체

지금, 여기서, 연결되기

by 밝음

어릴 때부터 뭘 모으거나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보인다고 다 갖고 싶어 하거나 무조건 많다고 좋아하지는 않았다. 수집의 기준은 '나의 선택'. 나에게 간택당한 것들만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들이라도 내 가슴을 끌어당기지 못한다면 내겐 가치 없는 물건이었다. 물건을 모으는 기준은 이랬다. '내 마음을 울리는가?', '내 가슴을 열리게 하는가?'


기억에 남는 첫 물건은 우표였다. 그 시대에 우표의 가치는 상당했다. 특정 한정판 우표 같은 경우는 가격도 꽤 비쌌던 걸로 안다. 그런데 나는 금전적 가치와는 상관없었다. 표현을 해보자면 그림조각을 모으는 행위였다. 조그마한 우표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있었다. 그게 나에게는 예술작품 같아 보였다. 여덟 살 아들이 카드 보관집에 열심히 포켓몬카드를 모으듯 그 시절의 나는 우표 보관집에 열심히 우표를 모았다.


나만의 고유한 갤러리였다. 심심할 때마다 보관집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모여진 우표들을 구경했다. 구경할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단순히 소유의 기쁨은 아니었다. 곁에 두고 보는 기쁨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기쁨이다. 내 눈에 멋진 것. 그땐 그게 우표였다.




그 뒤로도 나의 수집이력은 여럿 있었다. 예쁜 엽서 모으기, 좋아하는 연예인 잡지 모으기, 사쿠라 젤리펜 모으기, 펜팔 편지 모으기 등. 그것에 대한 내 사랑이 끝날 때까지 오래도록 모으며 보고 또 보며 살았다. 나의 수집품들은 기쁨이고 행복의 원천이었다. 그걸 보는 건 나에게 놀이이자 휴식이었다.


수집품에 대한 집착은 특정 시기가 끝나면 중단되었다. 사람의 인생에도 큰 흐름의 운인 대운이 있듯 내 수집 인생에도 오고 감의 큰 흐름이 있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닳도록 봤던 것들인데 그 흐름이 끝나면 세상 쿨한 여자가 되었다.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이별을 했다. 온 마음 다해 사랑하고 곁에 두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내 것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내 마음이 떠난 곳은 빛이 꺼지고 아름다움이 옅어졌다. 그렇게 반짝이고 멋져 보이는 것들이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되었다. 나는 대체 어떤 아름다움을 보고 느낀 것일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하면서 세상은 발전했지만 내 수집사랑은 도태되어 갔다. 알록달록 예쁜 펜으로 글씨를 쓰는 시간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펜팔 하는 친구에게 보낼 예쁜 편지지를 고르는 즐거움의 시간들은 이메일을 통해 손쉽고 빠른 편리함의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이젠 그마저도 없다. 모바일폰이 있으니 세계 어느 각국으로 흩어져도 다이렉트 메시지로 아쉬움 없이 필요의 이유로 연락을 한다. 예쁜 사진이나 그림들도 언제 어디서든 검색할 수 있으니 실물을 모으는 일 따위를 하려고 할 마음이 사라졌다.


뭐든지 가능하고, 뭐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게 진짜 좋은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쉽고, 뭐든지 빠르다면 무조건 좋은 게 맞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 세상은 좋아졌다. 누리는 것도 많아졌다. 그런데 자꾸 잃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무엇을 잃은 걸까.


기다림의 설렘을 잃었다. 희소함의 가치를 잃었다. 소중했던 것들이 소중하지 않게 되었고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당연해지면서 소중한 마음을 잃었다. 과거에는 시간을 더하고, 노력을 더하면서 마음을 모으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을 모으지 않아도 되니 마음을 모을 일이 없다. 그래서 몸은 편한데 자꾸 마음이 시리다.




내 손에 있던 에너지가 그 물건의 에너지와 닿을 때 서로 공명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교류가 일어나고 동물이나 자연과도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더 나아가 물건과도 특정 교감이 발생한다. 전자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 종이책을 볼 땐 느껴진다. 책마다 다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자판을 두드릴 땐 잘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연필을 들고 종이에 메모를 하면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조용히 숨은 마음이 피어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연결로 살아가고 연결로 서로 힘을 주고받는다. 연결은 사랑이고 생명 에너지다. 과거와 미래조차도 수많은 현재가 이어져있는 것이다. 연결되어야 살아갈 수 있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서로가 가까워진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은 것들이 더 멀어지고 단절되었다. 마음을 쏟지 않아서 마음 쓸 일이 없어서 자꾸 내가 내 마음과도 단절이 된다. 나와의 단절은 모든 것과의 단절이다. 마음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다. 쉽게 자주 본다고, 매일 본다고 해서 마음이 연결되는 건 아니다. 마음은 깊이의 문제다.


'공명', '교감', '공감'


세 가지 기역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특정 인물이거나 무조건 사람일 필요는 없다. 내가 내 마음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괜찮다. 사소해도 괜찮다. 누군가는 눈 떠서 고양이와 살을 부대끼며 자신의 마음과 연결된다. 누군가는 파란 하늘을 보며. 누군가는 이웃을 도우며. 누군가는 길에 피어난 풀꽃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과 연결되고 누군가와 연결되며 살아간다.


우리 삶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금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결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내가 나와 연결될 수 있는 순간도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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