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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Apr 15. 2024

내 이름은, 예쁘다.

불러서 지겨웠던 이름은 간절함이 되었다.

애정이 생긴 사람이 밀땅을 하듯 따스함을 주지 않는 서늘한 봄이 이어졌다. 애타는 마음을 알았는지 4월 둘째 주가 되자 “옛다 봄!”하며 보란 듯이 완연한 봄 날씨를 준다. 낮기온이 15도를 넘어가니 차를 타자마자 “와 덥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날도 더워졌지만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라 마음도 훌쩍 더워진 참이다.


영원불멸할 것처럼 정정하시더니 지금은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는 작은 촛불 같다. 일 년 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허리가 아프셔서 시작한 요양병원 생활이었다. 잠깐 일 줄 알았던 요양병원 생활은 할머니의 영원한 터전이 되어버렸다. 돌봐줄 수 있는 유일한 손길이 있는 곳이고 다른 삶으로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문이 되어버렸다. 분명 입원 전까지 멀쩡하셨다. 기력이 점점 달리긴 하셨지만 멀쩡하게 통화를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그런데 입원 후 신체적, 정신적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셨다. 


할머니 연세는 93세였다. 몸의 큰 적신호는 전체의 신호였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매일 한결같은 할머니였기에 영원히 그럴 것이라 또 간과했다. 그 연세까지 멀쩡히 돌아다니시고 하물며 밥 짓고 집안일도 손수 다하셨기에 우리는 모두 그런 할머니를 당연하게 생각해 버렸다.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늘 지금은 아닐 거라고 믿으며 또 그날을 무시하며 살았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로 다시는 방심하지 말자며 다짐했지만 또 망각하며 살았고 다시 그런 날이 와버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작은 아버지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할머니가 계시는 김해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부부에게 미주알고주알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신다. 얼마 전 총선이 있었던지라 역시 정치 이야기도 빠질 수없었다.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마음 한편엔 점점 가까워지는 할머니에 대한 저릿한 마음이 가득했다.


뵙고 싶은 마음은 늘 가득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말을 속으로 변명처럼 외웠다.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은 환자의 보호자 면회가 일주일에 한 번만 가능했다. 돌아가신 큰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아직 자식이 넷이나 남아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건 무리다. 딸 같은 손녀와 진짜 딸과 아들은 다르니까. 


작은 아버지나 고모가 가시는 면회시간을 맞춰서 함께 가야 하니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던 면회는 한 달, 두 달 지나더니 결국 해를 넘겨버렸다. 할머니를 뵙지 못하는 중에도 늘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보고 싶다는 그리움, 또 하나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핑계로 가지 못하는 동안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오늘은 다행이다. 그리움과 두려움을 모두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병원에 도착해서 셋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했다. 음성이 나오고서야 면회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침대 바퀴들이 굴러 들어왔다. 할머니는 누워계실 수밖에 없는 환자라 면회 때 침대가 통째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반가움보다 안타까움이 먼저 앞섰다. 하루종일 천장만 보고 계시는 건 아닐까, 잠깐 잠시 왔다 갔다 하는 간호사,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의 얼굴 외에 그 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견뎌내고 계시는 걸까. 


"할머니, 수현이 왔어." 

"할머니, 나 누구야? 누군지 알겠어?"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몇 번 껌뻑껌뻑 하시더니 한 마디 내뱉으신다. 

"예쁘다."


분명 처음 입원하셨을 땐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름도 이야기하셨는데 이젠 나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울컥하며 올라오는 마음들을 애써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잡은 손은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같았다. 이 손으로 나를 키워주셨구나 싶어 더 꽉 잡았다. 할 수 있는 건 잡은 손으로 내 온기를 할머니에게 드리는 것, 그리고 내 눈으로 할머니의 눈을 맞추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표현은 하실 수 없지만 분명 할머니도 그 순간을 가득히 느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한평생 자식만을 위해 살아왔기에, 그 사랑 가득한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 우리가 가지는 마음을 오롯이 똑같이 가지고 계실 것이다. 




비록 병원에 누워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주고 계셨다. 여전히 자식들이 찾아갈 안식처가 되어주시고 여전히 그리우면 볼 수 있다는 안도를 주고 계셨다. 아직 말을 건넬 귀가 열려계시고 살을 비빌 수 있는 따스함을 가지고 계셨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늙어서 가만히 병원에 누워서 살아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이다. 할머니의 삶을 보며 그것 또한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어떤 삶이든 의미 있는 삶이었다. 


10분. 찰나 같은 면회 시간이 지나버렸다.

"할머니, 나 누구야?"


"예쁘다."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물었지만 예쁘다는 말 뿐이었다. 평생 "수현아", "수현아" 할 때는 나 좀 그만 찾으라며 그 부름이 지겨웠는데 이제는 이름만 한 번 불러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수현이면 어떻고 예쁘다면 어떻겠나 나를 보고 한 말이면 된 거지. 할머니에게 내 이름은 "예쁘다"다. 




등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고요했다. 올 때는 이런저런 수다로 가득했는데 갈 때는 먹먹한 적막만이 가득했다. 아마 각자의 세계 안에서 많은 마음들을 만나고 있었을 테다. 그리움, 안타까움, 슬픔, 후회, 두려움까지. 


세탁기 잘 안 돌아간다고 전화올 때 투덜거리지 말 걸.

할머니 옆에서 같이 TV 더 많이 볼 걸.

동네에서 떵떵거릴 수 있게 용돈도 더 많이 드릴 걸.

믹스커피 못 드실 때 알아차릴걸.

뭐 잘 못 드시겠다 할 때 눈치챌걸.

고맙다고 할걸. 키워줘서 정말 많이 감사하다고 말할걸.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게 지금은 후회뿐이라 마음껏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잘 지내고, 아무리 잘했다고 한 들 후회가 남지 않을까. 그래도 후회는 하염없을 것 같았다. 후회는 사랑 옆에 붙어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마음껏 후회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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