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부모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잘 읽지 못한다. 아무리 잘못이 많아도 낳아준 부모라는 이유로 결국 화해하는 이야기 역시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랑을 드러낸 적이 없지만 사실 마음 속 깊이 사랑을 한다는 부모의 이야기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아마도 내 안에 꼬일대로 꼬여버린 부모를 향한 마음 때문이리라.
어릴 적 반복해서 꾸던 꿈이 있다. 꿈 속에서 나는 혼자 어디를 가기 위해 막 집을 나선다. 조금 걸어가다 보면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나는 다시 돌아서 집으로 간다. 내게 짐이 주어진다. 나는 그 짐을 들고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 못 가 또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뒤돌아 집으로 간다. 그러면 내게는 더 큰 짐이 주어진다. 짐 위에 짐을 얹어서 나는 또 떠난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간다. 꿈에서 깰 때까지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집에서 계속 나를 부르는 건 다름 아닌 나의 부모다. 나는 계속 어딘가로 가려 하지만 결코 떠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만 오가다 꿈에서 깨곤 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들 한다. 내가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십대 후반까지 같은 꿈을 꾸다보니 나는 꿈의 의미를 혼자 짚어보곤 했다. 부모는 왜 그리 나를 붙잡아 세운 걸까.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은 뭐가 그리 많았을까. 짐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은데도 부모는 내게 왜 또 다른 짐을 얹어주었을까. 그들은 알았을까. 내가 얼마나 버거운지, 내가 얼마나 가벼이 홀로 길을 떠나고 싶었는지. 사십 년 넘게 부모로부터 고통을 받다보니 이제는 이 꿈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걸 안다. 열 살도 채 되기 전부터 나는 이 무게를 감지하고 있었던 걸까.
사는 내내 부모는 상처였다. 엄마는 자신의 역할에 꽤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자식보다 자신이 훨씬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식은 그녀에게 이혼할 수 없는 걸림돌이거나 자신의 잔소리나 푸념을 감당해야 하는 감정해우소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아픈 것도 자신이고, 가장 위로받아야 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식의 아픔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가장 아프니 자식의 아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나는 커오면서 단 한번도 그녀로부터 위로나 공감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이해받기 위해 내게는 아빠인 사람을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의 입으로 세상 가장 나쁜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그녀를 통해 들은 나의 아빠는 근본부터 틀려먹은 온갖 파렴치한 짓을 다 하는 그런 글러먹은 사람이었다. 내게는 엄마다운 엄마가 없었다.
아빠는 애초에 처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처자식에 대한 의무감 같은 건 가지려고도, 가져야 한다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유혹에 쉽게 빠져들어 자주 돈과 시간을 탕진했고 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권위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권위가 있지도 않았다. 일생의 대부분을 술로 살았고 강한 아내에게 짓눌려 있었다. 십 수 년 전 술을 끊고부터는 상황이 역전돼 늙어버린 아내를 짓누르며 살고 있다. 치매라고 몰아세우기도 하고, 재산을 마음대로 유용하기도 한다. 재산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바가 거의 없음에도 입만 열면 자신이 모두 쌓은 부라고 주장한다. 내게는 아빠도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한때 나는 그들을, 그들이 살아온 삶을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분명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치 않는 운명을 살아내느라 그렇게 한 것뿐이라고 그들에게 온갖 면죄부를 쥐어주며 그럼에도 나를 낳아준 사람들이라는 걸 기억하려 애썼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십대에는 엄마의 작은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고, 짜증 한번 내지 않는 딸로 살았다. 정작 나는 그들에게 이해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시간이 쌓여가자 어느 순간부터는 내 속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을만큼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떠나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긴 여행을 떠나고 자취를 하고 결혼을 하며 어느 정도 부모와 나의 삶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더 멀어지려 섬으로 이주를 하기도 했다. 멀어지려는 내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부모는 한동안 섬에 따라와 살기도 했다. 그 사이 나는 아이 둘을 낳았고 인생에서 가장 힘에 부치는 시간들을 겪었지만, 그들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친정이 가까워 좋겠다는 부러움을 내비쳤지만 친정답지 않은 친정을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기에 타인은 쉽게 ‘그래도 친정인데’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러게 친정인데’라는 대답만 속으로 삼켜야 했다.
나의 부모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남탓만 하는 어른이 된 그들에게 서로는 서로의 인생을 잡아먹은 원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서로 아끼기 위해 함께 사는 게 아니라, 더 큰 복수를 하기 위해 서로를 놓지 못하는 관계를 이어갔다. 작은 허점이라도 보이면 서로를 공격을 했고, 어떻게 하면 재산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을지에만 골몰했다. 그러다 최근 상황은 겉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치달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합의이혼서류를 얼마 전 법원에 제출했다.
열 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 차라리 이혼을 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언니와 나는 부모의 이혼 서류 제출 소식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혼 서류를 제출하기까지 끝모를 싸움을 이어갔고 그때마다 자식들을 중간에 끼어놓고 미친듯이 괴롭혔다. 결국 언니와 나는 명절이나 가족행사를 앞으로 챙기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둘의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면 그래도 부모의 역할을 한 엄마는 가끔 보겠지만 아빠와는 연락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일 년 전쯤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장례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일처리를 하는 꿈이었는데 나는 꿈 속에서 전혀 슬프지 않았다. 깨고 나서도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부모의 장례를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이따금 그들의 장례를 내 손으로 치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크게 어긋남 없이 그들의 도움 없이 내 삶을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 했다고 느낀다.
부모의 장례를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는 어른이 된 나, 그들에 대한 글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토록 담담히 써내려갈 수 있는 나, 괴물이 된 건 그들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