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뭐든지 잘 하고 태도도 당당한 누나에 짓눌려 스스로가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던 아이. 그런 아이가 어느날 한참 달리고 나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뛰는 게 너무 좋아요.”
아이는 초등학생이 된 뒤 달리기 실력이 눈에 띄어 축구를 시작했다. 아이는 축구가 정말 좋았다. 책도 축구 관련한 것만 보고, 동영상도 축구만 봤다. 몸 쓰는 걸 특히 좋아하는 아이는 날씨가 궂어 집에 머물러야 하는 날에도 공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이는 어느덧 자라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된다. 원하던 축구팀이 있는 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되었다. 나이가 찰수록 훈련 강도는 심해졌다. 경기도 매주 풀타임으로 뛰어야했다. 컨디션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사춘기가 오면서 한번씩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마음만은 한결 같았다.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미래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몸이 좋지 않아 잠깐 휴식이라도 취하면 바로 주전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다시 자리를 차지하려면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더 나은 실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고나면 또 몸 상태는 나빠지고 악순환은 반복됐다. 그러다 아예 축구계를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아이는 쉴 수가 없었다. 학생임에도 이미 장기판의 말처럼 부려지는 선수가 된 이상, 축구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이상, 아이는 몸 상태가 나빠도 뛰어야했다. 심한 정신적 혼란에 빠져도 달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병원에서는 몸에 뚜렷한 문제가 없다고 했다. 몸의 모든 수치는 정상이었다. 구토의 원인을 밝혀낼 수가 없었다. 한의원에서는 아이의 진맥을 잡더니 몸의 모든 기가 빠졌다고 했다. 한동안 쉬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이는 쉴 수가 없었다. 자리를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쉬는 건 여차하면 축구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아이는 고민에 빠졌다.
공부만 하는 친구들은 일찍 자신의 진로를 잡은 아이를 부러워했다. 잘 하는 게 있어서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일찍 진로가 정해졌다는 건 일찍 사회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함께 축구하는 친구는 경쟁상대였고,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공격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그저 달리기가 좋고 축구가 좋아 시작한 아이에게 세상은 정글보다 더한 정글이었다.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었다. 무한경쟁만이 옳다고 여기는 어른들이 구축해놓은 세상이었다. 한번의 쉼도, 한번의 기다림도 없는 무자비한 세상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축구를 사랑한다. 제법 재능도 있다. 아이의 꿈은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아니다. 아이는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어한다. 정이 많고 배려심 많은 아이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현실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가더라도 프로축구계에 발은 디뎌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의 길로 갈 수 있다. 아이는 잠시만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원인 모를 구토가 이어지지만 아이는 계속 뛰어야 한다.
비단 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아이가 쉬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 누구일까. 이런 세상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 걸까. 누구를 위한 축구일까. 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한 날이다.
사랑하는 조카에게,
이모가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글뿐이라 정말 미안해. 얼른 낫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