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안에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 년 전 건강검진에서 이상한 수치 하나가 나왔다. 암이 있는지 없는지, 암이 자라고 있는지 사라지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수치였다. 초음파, 내시경에서는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흉부와 복부 CT를 추가적으로 촬영했지만,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는 6개월 뒤에 다시 피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반 년이 지나 어제 검사를 하러 병원으로 향했다.
오류라고 생각했다. 관련 일에 종사했던 분으로부터 생각 외로 오류가 제법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이상이 없는데 비정상적인 수치가 나왔으니 분명 오류일 거야. 지난 반 년간 거의 잊고 살았다. 가게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글까지 쓰다보니 일상은 늘 바빴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반 년은 순간처럼 흘러가버렸다.
어제 아침 병원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류일 거야. 오류겠지.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기다리다 검사 결과를 받았다. 예상과 달리 수치는 조금 더 상승해 있었다. 의사는 난감해 했다. 다시 6개월 전에 찍은 CT를 들여다보며 한참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3개월 뒤에 다시 한번만 더 피검사를 해보고, 그때도 수치가 높으면 PET-CT를 찍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작은 암세포도 발견하는 검사라고 한다.
나는 왜 지금이 아니냐고 물었다. 비용이 상당히 비싸다고 했다. 그리고 정황상 보여지는 특이점이 없기에 당장 검사하는 것보다 3개월만 더 지켜보고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마음이 복잡했다. 다시 6개월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도 이런 결과를 받고 나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뭍에 있는 다른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검사나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
엄마이자 아내이자 카페 운영자이다보니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움직이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거나, 대신 아이들을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둘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지역 대학병원을 믿어보자 다짐한 터였다. 하지만 반 년이 흘러 나는 다시 똑같은 지점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병원에 가보기로 거의 마음을 굳혔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와 비슷한 수치를 받은 사람들 중 일부에서 수 달 뒤나, 1-2년 뒤 암세포가 발견된다고 한다. 암세포의 경우 크기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어야 각종 검사에서 눈에 띈다. 그러니 내 몸 어딘가에 아주 작아 눈에 띄지 않는 비정상 단백질 세포가 자라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는 것. 그게 CT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피검사에서는 이상 수치로 나타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내 몸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암세포를 생각한다. 암세포가 자라는 중이라면 차라리 크기가 좀 커져서 추가 검사에서 발견이 되기를 바라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놓여 있다. 너무 작아서 좋아해야 할까, 너무 작아서 싫어해야 할까. 참 별의 별 순간을 다 맞닥뜨리는구나 싶다. 이런 순간도 몸과 머리로 받아들여 어떻게든 소화를 시키고 또 이겨내야 하는 거겠지. 무슨 놈의 인생이란 건 늘 이렇게 산 너머 산인 걸까.
'나의 해방일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태어나서 정말 좋았나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태어난 건 축복이고 살아가는 건 아름답다며 삶을 추앙하는 세상에서, 사실 태어나고 살아가는 게 그리 좋지 않다는 일갈이 시원하면서도 숙연했다. 세상이 부여한 의미에 맞춰가고자, 나의 탄생이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발버둥치는 게 결국 인생인 걸까.
곧 뭍으로 가야할 것 같다. 어젯밤에는 만일 내가 혈혈단신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아마도 벌써 육지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갔겠지. 내가 움직인다고 해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을테니 가볍게 다녀왔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도움을 청하는데 젬병인 나지만,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하는 때가 왔다. 나로 인해 양가 식구들의 일상을 깨야 하지만, 그럼에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신세 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하는 사람이다보니 이런 순간이 오면 어떤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이 든다. 적당히 신세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면,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았을까. 태어나서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또 생각해보면 태어났기에 의미를 부여할 삶이라도 주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태어났기에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또 살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닐까.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노력은 필요조차 없었겠지. 태어났기에 사는 걸까, 살기 위해 태어나는 걸까. 정답이 없는 물음 속을 헤맨다. 결국 이 글은 암세포를 찾기 위해 한계에 도전하는 이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