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Jul 19. 2019

제주에서 카페하는 진솔한 이야기

늘 위로가 되는 건 자연이다. 그리고 너희들.

제주에서 카페를 처음 오픈한  2014 1월이었다. 카페를 운영한  정확히  오년 반이 되었다. 처음 하는 장사였다.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안에 휴폐업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법  버틴 것도 같다. 정확히는 임대료와 인건비가 나가지 않았기에 버틸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년은 커녕  년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주 이주를 결정하면서 우리에게 직업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IT업종에 종사하던 남편과 그나마 가장 오래한 일이 언론사인 내가   있는 일이란 사실상 없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다보니 게스트하우스나 카페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게스트하우스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카페보다 규모가  크기에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쉽게 선택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이주하던 6  제주에 엄청나게 많은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어 선뜻 하려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2차로 결정한  카페였다. 기술이 조금 필요했고,  곧바로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중엔 무임금으로 일하며 로스팅을 배웠다. 남편은  사이 사표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정한 시점이 됐고 제주로 이주를 했다. 그리고 카페를 열었다.


 기억이 맞다면  당시 제주도내 영업 중인 카페의 수는 800 개였다.  당시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카페가 있다며 데이터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정확히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지금은 적어도 다섯 배가 넘는 카페가 제주도내에서 영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남편을 만났던 2011 제주에는 카페가 별로 없었다. 제주시내나 관광지에는 카페가  있었지만 시골마을에는 카페가 거의 없었다. 올레길을 걷다 시원한 음료가 생각나도  곳이 없었다. 밥을 먹을 곳도 많지 않았다.


지금의 제주는 다르다. 걷다보면 치이는 게 카페다.

우리 동네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오픈하던 시점에  동네에는 카페가 없었다. 우리가 운영하는 카페가 유일했다. 지금은  동네에 카페만 열네 . 게스트하우스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서너 개에 불과했던 숙박도 지금은 넘쳐난다. 같은 동네에 있으면서도 이름도 모르는 숙박시설이 있다.


그렇다면  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도 그만큼 늘었을까. 물론 예전보다는 많이 늘어난  사실이다. 유명한 관광지 인근도 아닌  작은 마을을 좋아해주고 찾아주는 사람들은 분명 제법 늘었다. 하지만 카페나 숙박시설이   정도는 아니다.  손님으로  차야만 먹고   있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현상유지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손님은 필요하다.


우리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견딜만 했다. 손님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식구 입에 풀칠할  있다면 여유로운 제주의 삶을 만끽하자  이런 낭만이 있었던  같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은행 빚이 늘어나면서 상황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없이 건물을 짓고 장사를   있는 사람은 드물다. 빚이 없더라도  식구가  달을 살려면 적어도 2,300만원이 드는 세상이다. 각종 보험과 세금, 휴대폰요금만 해도 1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간다.


 정도 비용을 카페 운영으로 벌려면   매출이 500만원 정도는 돼야 한다. 각종 공과금과 유지보수비용, 재료비 등을 최소로 감안해도 그렇다.   매출 500만원을 달성하려면 일주일 하루 휴무를 제외하고 일일 평균 20만원의 매출을 내야한다.


커피   값이 5천원이라고 가정하면 하루 마흔 잔의 커피를 팔아야 한다. 마흔 명의 손님이 일년 내내 우리 카페를 찾아올리 없다. 그렇다면 성수기에 바짝 벌어야 한다. 성수기는 짧다. 겨우 7월과 8, 그리고 간간히 주어지는 황금연휴. 그마저도 장마나 태풍이 끼면 손님이 없다.


날씨가 좋아 손님이 계속 있다고 가정하면 성수기  달간 하루 평균 50만원의 추가 매출이 필요하다. 하루 매출 70만원. 오년  동안 장사하면서  매출을 달성한    번이었다.


우리 카페는 제법 유명하다. 시그니처 메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인기가 많이 떨어졌지만, 잘나가던 어느 시절엔 일주일에 100kg 당근을 소비하는 카페였다. 제주 관련 잡지에는 대부분  번씩 소개글이 나갔다. 지역 방송도 마찬가지. 대만 방송에 나간 적도 있고, 최근에는 일본  잡지에서 촬영을 오기도 했다.(이렇게 한일 관계가 나빠지리라곤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유명한 방송 프로그램의 섭외를 받은 적도 있다. 방송만 타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손님도 줄을 선다는 그런 방송이었다. 당시에는 잠시 당근케이크를 판매하지 않았는데, 담당 작가는 어디서든 케이크를 구해와 그림을 만들어달라 요구했다. 없는 메뉴를  수는 없기에 거절을 했다. 순진했던 걸까. 만일 그때 거짓으로라도 방송을 했다면 우리는 성수기 일일 매출 70만원이라는 위대한 성과를 매일 달성할  있었을까.


오픈 초반  파워블로거가 카페를 다녀갔다. 우리에게 조언을 하나 했는데 스토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스토리가 있는 카페여야 블로그에 올리기가 좋고 홍보도  된다는 .  블로거는 알지 못했다. 우리 부부가 올레길에서 만나 결혼에 이른 커플이라는 . 오픈 초반에는 많은 손님들이 이런 우리 사연에 끌려 카페를 찾아주시기도 했다. 이따금 올레길에서 어떻게 하면 인연을 만날  있냐고 농담조로 물어오는 손님도 있었다.


나름 스토리도 있고, 시그니처 메뉴도 있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다. 카페는 생명력이 짧다. 기존 카페들은 우후죽순 생겨나는 신상 카페들에 치인다. (제주의 경우 바다뷰가 보장된 카페는 조금 예외일  있다.)


밥집은 오래되면   전통을 앞세워 인정을 받지만, 카페는 유구한 역사가 장점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 생겨 트렌드를  반영한 카페가 인기 있다. SNS 활발해지면서 사진  나오는 카페, 사진 찍을 포인트가 있는 카페, 사진 찍기 좋은 메뉴가 있는 카페가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도 인테리어에 많은 감각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오래 머물러도 눈치 보이지 않는 편한 분위기와 커피 맛에 오히려 집중했던  같다. 아이를 낳아 기르며 육아에 힘쓰는 동안 카페에 소홀했던  물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리를 비운   남짓 사이에 시장은 급격히 변화했다. 사람들은  감각있는 새로운 장소를 원했다.


적어도 5년을 주기로 카페의 인테리어를 바꿔준다면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5 동안 그런 돈을 모았을 리가 없다. 또다시 빚이다.


카페들은 커피를 파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다는  알게   하나둘 소품을 팔기 시작했다. 제주 기념품이 대부분이고, 예쁜 잔이나 그릇을 판매하기도 한다.   전만 해도 드물던 소품샵이었지만 이제는 제주 동네마다 여러 개가 들어섰다.  역시 그다지 매력적인 영업전략은 아닌 .


그렇다.  글은 카페를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한때 직장인들의 꿈은 사표를 내고 배스킨라빈스를 하나 차리는 거라는 말이 있었다. 요즘 직장인들의 꿈은 사표를 내고 카페를 창업하는 거라고 한다.


카페나 하나는 없다. 카페라도 하나  꾸려 나가려면 많은 조사와 분석, 노력,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새로운 메뉴 개발에 힘을 써보기도 하고, 인테리어에 나름 신경을 써보기도 하지만 뚜렷한 회생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카페 구조와 매출 규모상 새로운 메뉴를 마음껏 시도하기도 어렵다.  집보다는 우리집이 조금  오래 버티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오래된 일이다.


2공항이 들어서면 조금은 나아질까. 육지에 살았다면 당연히 반대했을  같은 공항 문제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밥벌이 때문이다. 이미 제주에 들어온 사람은 많고, 그들이 다함께 적당히 먹고  길은 막막하다. 공항이라도 하나  생겨 전체 관광객 수라도 늘어나면 먹고 살기가 조금은 나아질까 하는 마음에 선뜻 공항 건설문제를 반대할 수가 없다.


실제 제주공항에서 근무했던 친구로부터 기존 공항의 활주로가 제주 지형 대비 잘못 설계된 거란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안전 문제에 더해 결국은 밥벌이로 사안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야 결국 내가   있으니까.  아이들도.


그러게 뭣하러 아이를 둘이나 낳았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 요즘 세상에 자식을 하나만 낳아도 애국자란 말을 한다. 자식이 둘이라면 애국지사란다.

원래부터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명절이면 친척동생을 돌봐주는  내게는  기쁨이었다.


 시간동안 결혼보다는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결혼   시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제주로 이주한    년이 지나고 아이 없이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무렵 아이가 생겼다. 낳지 말아야  이유가 없었다. 이왕이면 힘들더라도 하나보다는 둘을 키우고 싶었다.


만일 내가 계산기를 꺼내 수입과 지출을 따지고 제주 경제상황을 분석해가며 임신을 준비했다면, 과연 나는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할  있었을까. 계산하지 않았기에 엄마가 되었다. 육아에만 충실했던 시간 동안에도  계산은 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아이를 향한 사랑에 집중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카페를 다시 나와보니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손님이 하나도 없던 어느 , 남편에게 말했다. 회사에 있었다면 일이 없어서 너무나 신나는 순간이었을텐데... 몸은 가만히 있는데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을 선택한다는  매일 매순간 먹고  길을 걱정하는 것과 같다.  자체가 너무나 치열해진 지금의 제주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더욱 그렇다. 업종이 특별하거나 사람이 특출나 대단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 않는 이상.


제주라서  힘든  백조처럼  위에선 우아해야 하고,  밑에선 열심히 헤엄을 쳐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멀리 육지에 있는 친구들은  프로필사진으로  삶을 짐작한다.  곳에는 제주의 멋진 자연이 있고, 해맑은 아이들이 있다.


프로필사진 같은 일상을 유지하려면 카페 하나만으로도  식구가 먹고   있어야 한다. 낭만을, 여유를 즐기는 삶을 구현하는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학원 하나 보내지 않고 아이를 키운다 해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내가 아무리 현재를 즐기는 삶을 사는  맞다고 믿는 사람일지라도 아이는 커가고 나의 노후는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십대 초반에는 친구와 타로나 사주보러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때마다 듣는 얘기는 누구 밑에서 일하지 못하는 팔자라는 . 팔자를 전혀 믿지 않지만, 아예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다. 회사생활은  답답했고, 동기부여가  되는 일상 속에서 월급만을 붙들고  삶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뛰쳐나온 직장이었다. 서비스직은 내게 제법  맞는다. 여행  사람들을 마주하는  과거의 나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 방황하던 나를 마주하고 공간으로 그들을 위로하는  내가 제주에 카페를 차린 가장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일이 좋고 내게 맞아도 유지하는 일은 또다른 문제다. 현실은 내게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글을 쓴다해서 현실이 나아지는  아니다. 다만 공감하고 싶었다. 공감받고 싶었고. 결국 글의 목적은 그런  아닐까.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위로하고, 글을  나도 그로부터 위로를 받는 .


태풍 때문에 손님이 별로 없어 글이 길어졌다.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 제주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모든 문제는 양지로 끌고 나와야 해결점을 찾을  있다는 어떤 막연한 믿음으로.


자연과 가까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