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Dec 25. 2020

시간을 죽인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자영업자들의 미래는 있는가

문득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시 집콕이 시작된 아이들과 하루를 어떻게 때우나 하는 고민을 할 때면 죄책감도 들지만 시간에 대한 개념과 감각에 대해 문득 긴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시공간이라는 말처럼 시간도 공간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데 그렇다면 시간을 죽인다는 건 불가능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말 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시간을 죽인다는 표현이 존재한다는 건 분명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그런 시간들을 보내왔다는 걸 증명한다. 먹을 게 없는 겨울에 들어섰을 때 수렵채집인들은 그저 겨울이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는 음식을 쪼개먹고 불멍을 하며 시간을 때웠을지도 모르겠다.


지구라는 확실한 공간 속의 우리들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늙어가기에 시간이 흐른다는 걸 체감할 수밖에 없다. 영생할 수 없기에 주어진 시간을 죽이는 건 죄인듯 보이지만 코로나라는 전무후무한 사태 속에서 백신 개발에 직접 나설 수도 없는 평범한 우리들은 그저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치료제가 나오기를, 백신 접종이 빨리 이뤄지기를, 결국 이 사태가 종결되기를, 예전처럼 자유롭게 전세계를 누빌 수 있기를 빌면서. 그런 우리들이 시간을 죽인다는 게 과연 죄일까.


인간이 편의에 의해 해와 달을 기준으로 만들어둔 한 달과 일 년, 연말과 연초. 코로나로 시작한 연초는 코로나로 끝나는 연말에 이르러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나 낮의 길이가 확연히 긴 여름쯤으로 정해두었다면, 이 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을까. 백신이든 치료제든 제대로 정착하더라도 수시로 변이하고 진화하는 바이러스 속에 살고 있음이 모든 인류의 뇌리에 명확하게 각인된 이상 우리는 과연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타인을, 타인이 혹시 전해줄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사회적 동물이 사회를 불신하게 되고, 타인을 믿지 못하게 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봄과는 다르게 자꾸 마음이 조여온다.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코로나19를 잘 모르던 그때엔 이 정도로 답답함이 몰려오진 않았다. 그저 몇 달 안에 끝나겠거니, 돌이켜보면 무슨 근거로 그런 예상을 했던가. 코로나는 인류 역사에 획을 긋고 있다. 명확하게 자국이 남을만한 자취를 깊게 깊게 새기는 중이다. 원래도 인생은 불확실하다지만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된 지금, 마음이 수시로 곤두박질치곤 한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문득문득 올라오는 막막함에 얼굴을 펼 수가 없다.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예측할 수 있다. IMF사태 이후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 시대가 열릴 것이란 걸. 코로나에 준하는 전시상황이 닥쳐도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대기업이나 공무원들은 별 타격이 없겠지만 자영업자들은 다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하루 벌어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줄여 엄청난 부채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그들 중에 결국 살아남는 건 자산이 충분한 사람들이나, 건물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대기업이 골목상권을 침범해 오는 건 더 심화될테고, 그저 필부필부인 우리들은 자기 가게 하나 운영해 보고싶다는 소박한 꿈을 꿀 수도 없는 세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 아이들은 어떤가. 소상공인 부모를 두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흙수저가 된다. 아직은 아이들이 어려 금수저 흙수저란 용어조차 모르지만(아주 늦게 알려주고 싶다.) 결국은 알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흙수저라는 걸. 자영업자로 살기로 한 결정은 나의 아이를 남들과 다른 출발점에 서게 한다. 막 장사를 시작하던 칠 년 전만 해도 내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죄책감이 되어 나를 덮친다. 나는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걸까.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들에게 취업은 너무나 힘든 벽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취업에 목을 맬 때 나는 꿈을 좇았다. 이십대에 꿈을 좇은 게 죄일까.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때를 놓치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단지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실을 너머 더 지옥같은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새로운 해가 오고 있는데도 자꾸 마음이 좁아지는 건 이 때문. 빈부의 격차를 막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결국 제도인데, 과연 정부와 국회는 피해를 최소화할만한 대책을 갖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자영업이 많은 나라다. 그 이유는 제대로 서지 못하는 중소기업에 있다. 정부는 중소기업에 임금을 지원하는 방안 외에 무슨 노력을 하고 있나. 중소기업에 들어가도 미래를 보장받고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노동시간에 알맞는 대우를 받는 것,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기본이 지켜지는 회사를 만들어내는 것. 이건 정부를 넘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문화가 정착되고 중소기업 오너들의 열린 마음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 자영업자들의 수를 줄이고 재취업을 늘리려면 결국은 중소기업을 살리는 것만이 길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슨 단추부터 끼워야 하는 걸까.  


아등바등하지 않으려 제주에 왔지만 여전히 몸부림치며 살고 있다. 제주도도 대한민국이다. 사회적 안전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 나라 대한민국. 이곳에서 길 잃은 자영업자들이 갈 곳은 무늬만 바꾼 또다른 자영업이거나 사회 밑바닥이라 불리우는 곳들이다.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생을 스스로 놓고 싶은 극한의 감정에 다다르게 될까. 가정이 깨어지고 상처받는 아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면 금융권이 타격을 받고 그 여파는 또 시장을 때릴 것이다. 그 끝은 회복이 가능한 사회일까.


큰 돈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먹고 살 수 있기를, 남에게 손 내밀지 않고 아이들 학원은 보내지 못하더라도 건강하고 자유롭게 키울 수만 있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소박하게 소망하던 최소한의 삶마저 붕괴되고 있다. 엄마인 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꿈을 마음껏 펼치라 말할 수 있을까. 대기업을 가고 공무원이 되라는 말을 하는 부모가 또 되어야만 하는걸까. 언제부턴가 꿈은 가진 자만이 꿀 수 있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나만의 가치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그 가치를 뚝심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간신히 세워둔 나만의 중심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린다. 멘탈이 정리되지 않으니, 자꾸 시간만 흘려보낸다. 미래의 생계를 위해 생산적인 고민을 하지도, 아이들과 행복한 한 때를 보내지도 못한 채 자꾸 시간만 죽인다. 새해가 오는 게 두렵다.



차가운 겨울은 아이들과 자연을 여유롭게 즐길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에서 카페하는 진솔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