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떠난 찰나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섬이다. 십 년만의 나홀로 육지행은 가벼운 몸으로 하나라도 더 보고, 더 하려는 촘촘한 시간들로 채우다 끝이 났다. 새로운 사람과 익숙한 사람을 만났고, 젊은 날 방황했던 도시의 밤과 여전히 분주하게 도시의 문법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오롯한 내 자신으로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섬으로 이주한 뒤 이따금 서울을 밟으면 갖가지 감정들이 휘몰아쳐 나를 덮치곤 했다. 그 감정은 주로 답답함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빽빽한 건물들, 쏟아져나오는 차량들 사이를 누비면서 내가 도시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 왜 이 도시를 떠나야만 했는지를 곱씹어보곤 했다. 도시가 낯선 아이들은 연신 재잘대고 공간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내이고 엄마인 나는 어깨 가득 짐을 얹고 도시를 걸어야 했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누구의 딸이 아니고 누구의 아내가 아니며 누구의 엄마가 아니었다. 나는 어떤 무게도 지니지 않은 오롯한 나이고자 했다. 그저 내 자신이고 싶었다. 낯선 나라로 자주 떠나던 시절의 나도 그저 나로 서기 위해 떠나곤 했다. 모든 삶의 무게를 내려두고 나라는 한 사람의 무게만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삶을 나는 늘 갈망했던 것. 그렇게 홀로 서서 다시 도시를 바라보니 도시는 좀 다르게 읽혔다. 답답함은 제거되고 그 도시를 누비던 공허하던 지난 날의 나와 조금은 단단해진 지금의 내가, 시간차를 거스르고 묘하게 공존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다.
섬에 도착해 아이들과 남편을 마주하고야 나는 다시 내가 누군가의 엄마이고 누군가의 아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조금 낯설다고 했다. 나도 아이들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작 이틀이 조금 넘는 시간만에 내가 이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책임지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나는 아이들을 오래 꼬옥 껴안고 어루만졌다. 그렇게 피부로 아이들을 느끼고 나는 다시 엄마의 자리에 나를 끼워넣는다. 나의 부재를 빈틈없이 채워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아내의 자리도 다시 차지한다. 그렇게 섬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나는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짊어진다.
그러고 보면 그토록 홀로 서고자했던 사람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게를 내려놓고자 했던 사람이 스스로 무게를 짊어졌으니, 그 무게의 힘으로 남은 삶을 걸어가고자 했으니, 그렇게 하면 타고 태어난 숙명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질 거라 여겼으니. 나의 착오였을까, 그 시절 나의 당연한 선택이었을까. 역할의 무게는 사실 짊어지기 전에는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게 되는 무게가 얼마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또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게 아닐까. 그 무게를 정확히 알았다면 우리는 그 짐을 기꺼이 짊어졌을까. 한번뿐인 인생에서 선택한다는 건 어떤 결과가 오든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는 사실이 문득 참 가혹하게 여겨진다.
나는 또 홀로 길 위에 설 것이다. 처음은 어렵지만 두번째부터는 그렇지 않듯, 모든 무게를 내려놓는 여행을 이따금 시도해보려 한다. 남편에게도 그런 여행을 허락하려 한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그때는 아이들도 그런 여행을 떠나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이기도 하지만 개개인이기도 한, 서로를 사랑하고 일상을 공유하되 각자만의 비밀스럽고도 자유로운 삶도 중시하는 그런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짐을 함께 짊어지기도 하고 때로 완전히 내려놓기도 하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은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혼자이기에.
새로운 시간들을 보낸 뒤 쏟아지는 문장 속을 행복하게 거닌다. 나는 다시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살피며 틈틈히 글을 쓴다. 머릿속의 문장들을 붙잡아 하얀 백지에 가두고 마냥 흐뭇해 한다. 영원이 실종된 세상에서 글로 영원을 바라는 이 작고도 큰 마음을, 그 과정을 통해 일상을 살면서도 온전한 나를 잃지 않기를 소망하는 이 간절한 마음을, 어떤 무게에 짓눌리더라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