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이 되기까지 인생은 타고 태어난 의미를 찾는 여정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꼭 찾아내고 스스로 의미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근본에 깔린 생각 때문에 늘 나의 일상은 무겁고 동시에 버거웠다. 행동 하나 생각 하나 내가 선택하는 길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가 있어야 하기에 나는 모래주머니를 양 발에 찬 것마냥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곤 했다.
인간의 생에 사실 의미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달은 건 과학을 가까이 한 뒤였다. 첫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과학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정작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과학과는 너무나 먼 삶을 살아왔는데, SF책이나 영화를 볼 때에만 가깝게 느끼곤 했는데, 아이가 좋아하다보니 내 기호와는 상관없이 자주 과학책을 보게 되었다. 자꾸 보다보니 과학은 정말 흥미로웠다. 내 안에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과학은 단연 관심이 가는 분야였다. 아이의 책을 넘어 내가 직접 과학책을 고르고 읽기 시작했다. 생물, 화학, 지구, 우주, 물리 등. 세상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내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히 답하는 과학의 세계를 접하면서 나는 내 안의 세상을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렸다.
그런 시간들이 더해지자 어느 순간 인간은 그저 한 생명에 지나지 않으며 길가의 풀 한 포기와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인간은 지구에 나타난 하나의 호모종일 뿐이고 세상의 많은 생명들이 그러하듯 운이 좋으면 종족을 보존하며 오래 삶을 유지하지만, 운이 나쁘면 작은 곤충처럼 쉽게 목숨을 잃기도 하는 존재라는 걸 불현듯 알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이상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다. 몸과 영혼은 결국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고, 생명이 꺼지는 순간 인간은 결국 흙이 될뿐 구천을 떠도는 영혼 같은 건 없다고 믿게 된 것. 영혼이 없다면 죽고난 뒤 세상을 떠돌 일이 없으므로 종교계가 말하는 사후 세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사고방식이라고 덧붙인다. 무신론자지만 누구보다 종교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존중한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고 그저 갑자기 왔다 갑자기 가는 풀 한 포기, 작은 곤충 같은 생명일 뿐이며 우리가 얻은 생에 큰 의미는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삶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했던 의미가 한순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에게 있어 ‘왜 사는가’의 의미는 애초에 없는 것이라니. 인간만큼 의미를 찾는 동물도 없을텐데. 하지만 역설적으로 ‘의미가 없다’ 생각하니 오히려 그렇다면 ‘어디에서 의미를 찾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뿌리에서 다시 생명의 잎이 돋아난 것.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면 삶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의미가 없는 순간들은 모두 공허가 되고 의미가 없는 만남도 의미가 없는 밥벌이도 전부 낭비가 된다. 그러면 삶은 고립되고 만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며 의미를 모르는 일은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의미가 아예 없다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더 자주 벌어지고 의미 없는 말과 행동으로 세상은 상처 투성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살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의미를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다른 동식물처럼 내 몸에 프로그래밍 된 건 오직 유전자 퍼뜨리기 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내가 되고 더 나은 세상이 되는 일을 고민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 의미없는 세상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으므로. 그래야 의미없이 부여받은 목숨을 가치있게 쓸 수 있으므로. 때문에 인간은 의미없이 태어났다는 걸 깨달아도 결국 죽을 때까지 의미를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다. 남달리 의미있는 삶을 산 사람을 칭송하는 게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내게 글은 내 목숨에 부여하는 의미이며, 내 삶을 지탱해주는 목표이고, 내 삶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다. 이렇듯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글 쓰는 것에 상당 부분 무게를 두고 있다. 아내로 살아가는 것도 엄마로 살아가는 것도 내 삶에 분명 의미가 있지만,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내 자신으로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것. 이 의미의 탄성으로 나는 꼿꼿이 서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간다.
문제는 한번씩 이런 내 삶에 허무가 밀려온다는 것. 내가 찾은 의미보다 타고난 의미에 무게가 더 실릴 때, 나는 속절없이 허무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럴 때는 글을 쓰기가 참 힘겹다. 내가 글로 적는 모든 말이 누군가는 한번 했던 말이고, 특별함이 없는 그렇고 그런 의미없는 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빠지면 글을 도무지 쓸 수가 없다. 예사롭지 않은 단어나 상황이 와도 그저 흘려보내고 인생무상의 자세로 그야말로 의미없이 태어난 인간을 자처하게 되는 것. 요 며칠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아무리 글을 써도 그 글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미없는 글자들만 줄세운 듯했다. 일정하게 머무르는 좌표 없이 떠도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쓰려 하는가. 과거 깨달았던 것들도 모조리 다시 뒤집어 보고 자책에 빠진 최근의 나날들.
그러니까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허무에 빠져 원하는 글이 무엇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나를 살려내기 위해 심폐소생술 하듯 삶의 의미를 파헤치며 이 글을 써내려가는 것. 오랜만에 그렇게 삼천 자 가까이 되는 글을 간신히 써낸다. 나는 이 글을 계기로 다시 쓰는 사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쓰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을까. 쓰는 삶 하나만이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로 남아있다. 이를 살려내지 못하면 나는 붕괴할지도 모른다.
한동안 매일 꾸준히 몇 자라도 쓰는 것에 몰두해 있었다. 글쓰기를 습관화하려고. 그러다 너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아 잠시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제 내게는 ‘제대로’ 쓰는 게 중요한 시점이기에 쉬어가면서 이를 고민해봐야지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바로 허무의 절벽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나의 심폐소생술은 성공할 것인가. 존재의 의미라고는 없는 허무의 세상에서 나는 힘겹게 의미를 찾아내 동아줄을 스스로에게 내려보낼 수 있을까. 결국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고 믿는다. 글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이번에도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아도 의미는 여전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가 된다. 삶의 아이러니. 세상의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