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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by 박순우

인천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넌 적이 있다. 십수 년 전이었는데 회사 연수로 팀을 나눠 중국 칭다오로 향했다. 이제는 맥주로 더 유명한 그 곳, 칭다오. 말이 연수지 사실 회사에서 보내주는 여행이었다. 저녁에 배에 올라 잠을 자며 바다를 건넌 뒤 아침에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회사사람들과 함께 가는 여정이지만 꽤 들뜬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나중에 알고보니 이 배는 영화 '공모자들'의 배경이 된 무시무시한 장소였다.)


웬만한 건물보다 더 큰 배에 타는 건 처음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으로 배에 올랐다. 배 내부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니 음식점, 편의점, 노래방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와 한 방을 배정받았다. 평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의외로 마음이 잘 맞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배 곳곳을 둘러보았다. 배는 곧 출발했다. 배는 생각보다 훨씬 세세한 운전이 가능한 교통수단인 듯했다. 정박된 곳이 무척 좁은 곳이었는데도 섬세하게 지나는 걸 보면서 감탄을 했다. 그 당시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인천대교 아래를 배가 통과할 때는 서해 낙조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그렇게 배에서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았지만, 진짜 황홀한 순간은 깊은 밤에 찾아왔다. 배는 점점 서쪽으로 향했다. 배보다 빨리 서쪽 하늘을 통과한 태양 때문에 금세 하늘은 검게 물들었다. 동갑내기 친구와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좀 심심해진 우리는 밤 풍경을 보자며 늦은 시각 갑판을 찾았다. 예상과 달리 갑판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배 자체 조명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가장 밝게 갑판을 비추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보름달이었다. 달이 그렇게 밝다는 걸 처음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배는 망망대해 중간을 지나고 있었다. 떠나온 곳도, 향하는 곳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바다 한가운데였다. 배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도 인공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가로등처럼 묵묵히 밝히고 있는 게 보름달이었다. 보름달은 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해 못지 않게 세상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암흑일 줄로만 알았던 바다는 달빛을 받아 연노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윤슬은 낮에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


그날 나는 달빛을 담은 바다를 오래오래 눈에 담으면서 전구가 없던 시절의 밤을 떠올렸다. 집집마다 환한 등불을 밝힌 게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니, 30만 년 지구에서 버텨온 과거의 인간들에게 밤은 얼마나 두려운 시간이었을까. 길고 긴 겨울의 밤은 여름의 밤보다 훨씬 더 무섭지 않았을까. 영영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을 것이다. 모닥불 하나에 의존해 불씨가 행여나 꺼질까 노심초사하는 긴긴 밤을 떠올리니 그런 시절의 달은 얼마나 반가운 존재였을까 싶었다. 초저녁부터 동쪽 하늘에 떠올라 긴긴 밤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보름달은 특히 손꼽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조금씩 길어지던 시점을 태양절로 정한 것도, 훗날 로마에서 이날을 예수 탄생일로 변경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인간에게 빛은 그만큼 귀중한 존재인 것.


섬마을 시골에 내려와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려고 누웠는데 창밖에서 누군가 내 얼굴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그곳에 보름달이 있었다. 보름달은 잠을 달아나게 할만큼 강한 빛을 뿜고 있었다. 눈을 꼭 감아도 내 얼굴 위를 흐르는 달빛이 느껴졌다. 그날 밤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달이 얼마나 밝은지. 섬에서 이따금 그런 보름달을 만나면 망망대해에서 마주했던 그날의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빛을 길잡이 삼아 서쪽으로 향하던 그날의 배가 떠오른다. 당시 나는 남몰래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가는 길에 행여나 등불 하나도 밝혀져 있지 않을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날의 달빛이 어루만져 준 건 바다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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