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자꾸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이십대의 나는 나를 알고 싶어서 글을 썼다. 나는 나였지만 나를 알지 못했기에 쓰고 또 쓰면서 나는 나를 알고자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상황을 견딜 수 없는지, 어떤 상황은 견딜만 한지, 그런 것들을 글을 쓰면서 하나씩 깨달았고 그렇게 나는 나를 알아갔다. 나로 살지 못한 시간의 괴로움은 그 무엇보다도 깊었기에 내게 그 시간들은 꼭 통과해야만 하는 터널이었다. 그리고 그 터널 끝에 나는 완전한 내가 되었다.
요즘 나는 글을 쓰면서 종종 부모를 만난다. 내게 부모는 아픈 뿌리다. 상처가 많이 나고 이리저리 뜯겨있어 잘라내도 무방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아예 잘라버리면 아픔이 너무 커 줄기를 뻗고 잎을 돋우는데 큰 제약이 되는 그런 뿌리. 그 뿌리를 나는 잘라내지도 그렇다고 영양분을 주고 제대로 살려내지도 못한 채 그저 놔두고 있다. 뿌리는 줄기와 잎의 노력만으로 복원될 수 있는 기관이 아니기에, 뿌리 스스로가 수분이나 영양분을 향해 잔가지를 뻗어가야만 살 수 있기에,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뿌리에게 기회를 주는 것. 뿌리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내게 기다림은 결국 뿌리가 복원력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과 같다.
글을 쓰다가 그 뿌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예고하지 않았지만, 내 삶을 적으면서 뿌리는 언제든 조연이나 단역으로 글 속에 등장한다. 그때마다 나는 망설인다. 내 손가락이 적어내는 이 글들을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잘라내고야 말 것인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이유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 아직은 온 마음으로 뿌리의 사정에 대해 귀 기울일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 아주 오랜 시간동안 뿌리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이야기의 절반쯤은 거짓이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거짓들을 알게 된 후 나는 더이상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내가 글을 쓰며 찾아내는 뿌리의 이야기는 아프고 날이 서 있기도 하지만, 의외로 따뜻한 구석을 지니고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것, 몇 번 되진 않지만 엄마가 자신의 코와 내 코를 마주 비비며 미소지었던 아주 어린 날의 기억 같은 것,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엄마의 수첩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거기에 빼곡히 적힌 내 여행지의 목록 같은 것, 이걸 왜 적어두었냐는 내 물음에 엄마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날아가야 하니까,라고 덤덤히 대답했다. 나는 그 순간 아주 조금 눈물을 삼켰다. 떠오른 이야기들이 아픔이 아니라 사랑일 때 나는 더 오래 앓는다.
그런 기억들이 튀어나올 때면 나는 애써 반대되는 기억들을 소환한다. 이를 테면 이런 것,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수많은 과일 중에 유독 바나나를 잘 먹지 않는 것도, 탈이 난 어릴 적 기억 때문에 성게나 멍게, 생굴 등을 입에 대지 못하는 것도 엄마는 알지 못한다. 언니가 비린 생선을 잘 먹지 못하는 것도 엄마의 사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자식이 고작 둘인데 남이어도 식사를 몇 번만 같이 하면 알 수 있는데도, 엄마는 자식의 식성을 알지 못한다.
오랜 세월 엄마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다. 자식은 그녀의 인생에 들러리나 조연에 불과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지만, 철저하게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부모를 만나면 그 자식은 많이 외로워진다. 자식의 자리가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주연인 부모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 이런 기억을 소환해 나는 균형을 맞춘다. 글을 쓰다 불쑥 튀어나오는 사랑과 전반적으로 내게 깔린 그들의 무관심을 동일선상에 두고 저울질을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는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종종 궁금했다.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의사표현이 없던 시절의 나는 분명 그녀의 손길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녀로 인해 사람이 되어 갔을 것이다. 울어대면 그녀의 품에 안겨 안정을 찾고 배고프면 그녀의 손길로 배를 채우고 호기심이 발동하면 그녀의 설명으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갔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의 힘으로 나는 효를 행하곤 했다. 내게는 없지만 분명 존재했을 시간들을 상상으로 복원해 내가 그녀에게 여전히 자식인 이유를 캐냈다. 부모가 절대적인 우주인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생긴 이후의 기억 속에는 그녀의 사랑이 너무도 성기게 박혀 있어 긁어 모으기가 힘이 드니 나는 어떻게든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 속을 캐내고 캐내어 자식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도리의 명분을 만들어냈다.
그 마저 모두 멈춰버린 요즘, 나는 글을 쓰면서 내 안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 속의 성긴 사랑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보통 내 이야기를 꺼내다 튀어나온 것들이라 깜짝 놀랄 때도 많지만, 나는 그런 기억들이 꺼내지면 그저 두고 가만히 살핀다.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관찰자가 되어 그 시절의 기억들이 내게 무엇인지 그녀가 내게 남긴 게 무엇인지를 가늠해본다. 글을 쓰다가 자꾸 이런 일을 겪다보니 이제 내가 글을 쓰는 건 내 자신이 아니라 내 뿌리를 이해하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내가 이제 찾아야 하는 건 내 자신이 아니라 내 뿌리인 걸까. 내 인생의 미결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뿌리이기에 글이 자꾸 나를 그리로 안내하는 걸까.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나는 결국 글로 그녀를 스쳐간다. 십 년 넘는 시간동안 글을 쓰고야 나는 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긴 시간동안 또 글을 써야 그녀를 알게 될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 것도 같다. 숙명을 풀기 위한 열쇠가 내게는 글이니, 결국 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완전한 준비가 되지 않은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 터널은 내가 가야하는 길이 맞을까. 이번 터널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