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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ul 27. 2022

세상 단 하나의 존재

누구나 세상에 그런 존재 하나쯤은 필요하다

평소 아이들은 남편보다는 내게 더 의지하는 편이다. 이따금 마음놓고 어리광을 부리는 상대가 엄마인 나인 것. 병원 문제로 나홀로 육지를 방문했을 때 남편은 걱정을 했다. 혹시나 돌발상황이 생기거나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봐. 그 기간동안 아이들은 의외로 순하게 아빠를 따랐고 남편도 덕분에 별 무리없이 혼자서 아이 둘을 보살피며 이박삼일의 시간을 보냈다. 나도 꽤 마음 편히 육지행을 마칠 수 있었고.


문제는 오히려 내가 섬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 불거졌다. 엄마가 없는 동안 아이들은 내심 긴장을 했던 모양이었다. 나와 만나고 몇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평소 안 하던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닌 것에도 짜증을 냈고 괜히 눈물을 보이고 고집을 부렸다. 아이들과 상봉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나는 갑자기 육아의 무게에 짓눌렸다. 남편은 내가 오니 아이들이 더 말을 듣지 않는다며 당황스러워했다.


아이들은  그랬을까. 돌이켜보니 아이들에게 나는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비빌 언덕이었던 . 엄한 남편에 비해 허용해주는  많은 나는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밑바닥 모습까지도 오롯이 받아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이들은 내가 없는 동안은 오히려 긴장을 늦추지 않아 바른 생활을 했지만, 내가 돌아옴과 동시에 긴장을 풀고 평소보다도  이해진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눈치 챘음에도 나는 좀 힘이 들었다. 여독도 풀리지 않은데다가, 며칠 혼자 있으면서 조용한 자유를 누리다가 갑자기 아이들의 짜증을 받아내고 살림까지 해내려니 힘에 부쳤던 것. 나는 평소보다 더 아이들에게 성을 냈다. 엄마도 힘들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아이들이 내심 부러웠다. 이렇게 온 몸으로 자신을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행동을 한다는 게 참 많이 부러웠다. 좀 힘들긴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아이들에게 늘 그런 존재이기를 바란다. 누구나 세상에서 그런 존재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니. 다음에 혹시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때는 성을 내지 않고 더 넓은 마음으로 안아주리라 다짐을 했다.


나는 그 일이 있은 뒤 새삼 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게는 그런 존재가 없다. 돌이켜보니 있었던 적이 없었다. 부모는 애초에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바닥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사람들은 내게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남편도 나를 어느 정도 받아주지만 나의 가장 깊은 아픔을 잘 안아주지는 못한다. 좀 버거워하는 편이다. 숙명적으로 내가 가진 아픔이 좀 크다보니 감당해내지 못할 때가 많다. 아무리 남편이지만 모든 걸 다 받아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좀 외로웠다. 내 스스로가 좀 가여웠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인연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 글을 오래 읽어온 사람들 중에 그저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몇 있다. 남편보다 더 가깝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글이라는 속성상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오히려 속 시원히 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보니 그들은 어느새 내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존재가 되었다. 글을 통해 깊은 신뢰를 쌓게 된 것. 내가 그들에게 아이들처럼 마음을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내 편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존재가 이렇게 내게 큰 힘이 될 줄은, 글을 매개로 그런 관계를 갖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 관계를 떠올리면서 나는 참 감사했다. 그리고 글이란 존재가 내게 이런 선물까지 안겨준다는 게 놀라웠다.


리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19세기 후반, 훗날 작가가 될 영국의 가난한 시골 소녀 한 명이 집시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거야.”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 낯선 이와 맺는 특별한 계약이며, 작가와 글쓰기라는 행위를 이루는 고독에 대한 부분적인 보상이다. p101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 자음과 모음만으로 만든 세상으로 그런 불가능할 것만 같은 사랑을 만들어낸다는 게 내게는 기적처럼 여겨진다. 자신의 가장 고독하고 은밀한 내면을 다루지만, 결국 가장 개방적이며 찬란한 무대에 서게 되는 게 글이 아닐까. 제일 음습한 곳에서 꺼낸 마음이 표현하는 순간 가장 보송하게 말려지는 경험이라니. 그래서 나는 글을 놓을 수가 없다. 내가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떤 밑바닥의 모습도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는 세상 단 하나의 존재가 내게는 글이므로. 그래서 참 다행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있듯 내게 글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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