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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ug 16. 2022

고해성사

누구를 만나든 내 본연의 모습 보이기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글’입니다.




글쓰기 모임에 위기(?) 찾아왔다. 갑자기  명이 개인 사정으로 빠지게  . 고작   모임이었는데  명으로 모임을 이어갈  있을까, 고민이 앞섰다. 다른 멤버들과 상의한 끝에 충원을 결정했다.  많은 다양한 글을 읽고 싶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 결과였다.


오지랖이 손바닥 면적도 안 되는 내가 제주 바닥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통로는 한정적이다. 먼저 친한 엄마들 모임에 글쓰기 충원 소식을 알렸다. 예상대로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절망스러웠다. 차선책으로 내가 운영하는 카페 SNS 계정에 글을 올렸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실제 지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온라인 모임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사흘 동안 모집한 결과 오프라인 모임 지원자는 딱 한 명이었다. 가능하면 두 명도 받으려 했는데 한 명이라도 지원한 것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이 지원자가 글을 본래 쓰던 사람이라는 것. 심지어 오랜 시간 논술선생님으로 활동한 분이라는 것. 그리고 잘 아는 언니라는 것. 지원을 해준 건 정말 반갑고 고마웠지만 덜컥 겁이 났다. 내가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멤버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모두들 대찬성하는 분위기다. 일단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충원을 확정했다. 정작 문제는 나였다.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이 모임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충원으로 고민이 해결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깊어졌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고민은 내 성향과 관련이 깊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내 방송부 활동을 한 나는 유독 선배들 앞에서 주눅이 잘 드는 편이다. 그 시절 학교 써클은 한 살 차이로도 대단한 위계질서가 형성되는 분위기였다. 선배들한테 기합을 받거나 맞는 일도 많았다. 선배는 하늘이었고 90도로 인사해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대학을 가면서 자유분방한 분위기 덕분에 나이차로 긴장하는 일은 이전보다 줄었지만, 한번 몸에 밴 습관이 완전히 나아지진 않았다. 나보다 어리거나 십 년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자유롭게 나를 드러내지만, 그것보다 적은 차이가 나는 사람 앞에만 서면 나는 말수가 줄었다. 평소에는 개그 욕심이 있어 광대를 자처하는데 나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자꾸 예만 갖춘다. 글쓰기 모임은 내가 이끌어가야 하는데 이런 성향이 나오면 큰일이었다.


그런 나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타인의 글쓰기를 돕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 나이에 제한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번 글쓰기가 처음인 사람만 마주할 리도 없다. 어떤 경력과 나이의 사람이든 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건 내게 늘 숙제같은 일이기도 하다. 내가 결국 극복해야 할 문제라면 지금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마음을 열어 이런 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두려움과 맞서기로 다짐을 했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세상은 다르게 보였다.


돌이켜보니 이 모임은 표면적으로는 내가 도움을 주는 모임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누구보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다양한 글을 읽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알 수 있었고, 보완할 점을 찾다보니 글에 대한 분석력이 좋아졌다. 또 에세이란 무엇인지 더 깊이 공부하게 됐고, 내가 글에 대해 알고 깨달은 것 중에 어떤 걸 함께 나누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새 멤버를 충원하면서 나는 이렇게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사실 아직 책도 하나 내지 않은 내가 모임을 이끄는 사람으로 군림한다는 게 애초에 도전이었다. 오랜 시간 작가란 무엇인지, 어떤 게 좋은 글인지 고민해왔다. 내가 생각한 작가는 '쓰는 사람'이다. 세상이 말하는 등단이나 책 출판이 아닌 늘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으로 보면 나는 이미 작가다. 매일 글을 쓰기 때문.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작가라는 이름 앞에 몸이 움츠러든다. 차마 그 이름을 내 것으로 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이 자꾸 눈에 걸린다. 누구보다 글쓰기를 사랑하고 글 쓰는 행위 자체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다. 타인에게는 관대하면서 정작 스스로에게는 냉정하게 구는 것.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다시 껴안는다. 나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부끄러워지지 않을 때까지, 더 당당한 내가 될 때까지.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가장 후회되는 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순간들이었다. 일 년 전 매일 쓰기로 다짐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와 약속했다. 후회가 남지 않을 때까지 쓰겠다고.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다. 쓰는 이들을 돕는 건 내 기쁨이자 사명이라고.


나는 글을 쓸 때 엄마도 아내도 바리스타도 아닌 진정한 내가 된다. 글쓰는 사람들을 도울 때 내가 아직 쓸모있는 인간으로 여겨진다. 여전히 글이 사람을 치유하고 나아가 세상을 치유할 거라 믿는다. 글만큼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건 없었다. 다시 어깨를 편다. 묵은 과제와 맞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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