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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Sep 16. 2022

몽롱한 건 김밥 때문

아이들에게 주려는 건 김밥이 아니라, 고소한 기억

정신이 몽롱하다. 바다에 누워 둥둥 떠있을 때처럼 귀가 멍멍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이게 다 김밥 때문이다.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매달 숲학교에 참여한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생명체들을 관찰하거나 낙엽을 밟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는 프로그램이다. 아이는 제주 전통의상인 갈옷을 입고 숲으로 간다. 도시락을 싸들고. 어린이집과 가정이 번갈아가며 도시락을 싸는데 이달은 가정에서 준비하는 달.


어제 저녁에 준비를 좀 해두고 잠이 들었으면 좋았을텐데, 요 며칠 체력이 너무 달려 저녁만 해먹고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에 아무런 준비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내심 불안했던지 새벽에 계속 잠에서 깼다. 세시, 네시, 다섯시... 그렇게 수시로 깨다 결국 여섯시에 몸을 일으켰다. 몸은 천근만근, 잠을 잔건지 만건지.


밥부터 부랴부랴 씻어 안치고, 사다놓은 단무지와 우엉을 꺼내고 맛살을 열 조각으로 자르고, 당근은 얇게 썰어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소금을 조금 쳐서 볶고, 시금치 대신 얼려둔 삶은 부지깽이 나물을 꺼내 물에 담갔다가 참기름 통깨 맛간장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고, 계란 여러 알을 깨서 푼 뒤 네모난 프라이팬에 부쳐 열 조각으로 자르고, 햄도 알맞게 썰어 구웠다. 그 사이 다 된 밥을 양푼에 퍼서 참기름 소금 통깨를 넣어 섞으면 준비는 끝.


김을 깔고 밥을 한 주걱 떠서 올리니 둘째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다. 더 자지 왜 나왔어. 다 잤어, 엄마 뭐해. 엄마 김밥 싸지. 둘째는 흘끔흘끔 잔뜩 벌여놓은 재료들을 보더니 거실 바닥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치고 들여다본다. 나는 그 사이 바쁘게 손을 놀려 열 줄의 김밥을 싼다. 마지막 김밥을 말 무렵 첫째도 깨어나고,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도 부엌으로 온다.


아이들은 예쁘게 썰은 김밥을, 남편과 나는 꼬다리 김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첫째는 어젯밤 꿈에 나온 이상한 괴물 이야기를 하고, 둘째는 오늘 친구들과 과자 파티를 하기로 했다며 신나한다. 남편은 출근을, 첫째는 등교를, 둘째는 등원을 한 아침. 그대로 소파에 드러눕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를 널고, 나도 씻고, 도서관에 가서 다 읽은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다시 빌리고. 그리고 카페 문을 연다.


일상은 늘 빈틈 없이 해야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한두 가지가 빠진 날은 한숨을 돌릴 수 있지만, 한두 가지가 오히려 추가된 날은 정신없이 몸을 놀리는 수밖에. 잠을 자는둥 마는둥 했지만 덕분에 오늘은 김밥을 점심으로 먹을 수 있다. 늘 카페에 있으면 대충 때우기 일쑤인데, 그래도 오늘은 밥이다. 점심을 먹고는 결국 진하게 드립커피 한 잔을 내 몫으로 내린다. 김밥과 커피의 힘으로 써내려가는 글이다.  


오늘은 김밥을 싸면서 함께 글을 쓰는  친구가 자꾸 떠올랐다. 음식을 소재로 글쓰기를 했을   친구는 김밥에 대한 글을 썼다. 너무나 바쁜 일하는 엄마로 인해 소풍  때마다 엄마가 직접  김밥을 먹지 못했던 친구. 일하는 엄마가 드문 시절, 모두들 직접  김밥을 싸오던 시절,  친구는  사온 김밥을 먹어야 했다.


 한번 엉엉  적이 있다고 한다. 나도 엄마가 싸준 김밥이 먹고 싶다고 말하며 크게  . 그날 친구의 어머니는 부랴부랴 장을 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싸주셨다고 한다. 친구 가슴에 맺힌 응어리와 미안한 마음에 분주히 손을 놀렸을 친구 어머니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글을 읽는 내내, 합평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이제 김밥 하면  친구의 얼굴과 글이 떠오른다. 글의 힘이란 이런 걸까.


김밥을 말 때마다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내가 주려고 하는 건 김밥이 아니라, 엄마가 나를 위해 이른 새벽 일어나 분주히 손을 놀리며 온 집안에 풍기던 참기름 냄새라고. 그 고소한 향기와 어둠이 잔잔히 남은 이른 아침의 풍경을 아이들은 분명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그리고 다 자란 어느 날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그 기억을 남겨주기 위해,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나는 피곤해도 지쳐도 김밥을 싼다. 그리고 그런 날엔 여지없이 몽롱한 하루를 보낸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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