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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Nov 21. 2022

증인처럼, 선배처럼

그럼에도 쓴다면 분명 어느 날 한결 맑아진 당신이 되리라

  글쓰기 모임의 이번 글감은 ‘휴식’이었다. 멤버들이 돌아가며 글감을 제시하는데, 완성된 글을 보면 신기하게도 그 글감이 왜 나왔는지가 보인다. 그저 하나의 글감인지도 모르지만, 그 소재를 떠올리게 된 삶의 맥락이 글에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그런 글감과 사람, 그리고 사연이 연결되면 어느 때보다 좋은 글이 탄생한다. 맥락이 있다는 건 오래 그 소재에 대해 고민해 왔다는 뜻과 같기에, 오랜 시간 숙성된 생각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간 글이 직조된다. 


  모임을 하루 앞두고 글을 모두 인쇄한 뒤, 한 글자 한 글자 뜯어보면서 글쓴이의 마음을 따라간다. 합평을 앞두면 평소보다 글을 정성껏 읽게 된다. 그렇게 읽다 보면 글쓴이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과 놓친 부분들이 보인다. 어느 걸 강조했고, 어느 게 부족한지, 무엇을 더하면 더 깊어질지. 글쓴이의 글에 대한 마음은 얼마나 열려 있는지도 살핀다. 그리곤 깊은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하면 글을 향한 마음을 더 열 수 있을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이번 글감을 냈던 멤버가 글을 쓰다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맥락이 있는 글감을 던졌으니 분명 멤버의 상처 하나가 글을 쓰다 건드려졌으리라. 글을 쓰면서 과거를 꺼냈더니 너무 서글픈 마음이 몰려와 눈물을 왈칵 쏟았다고, 이대로 계속 써도 되는 거냐고, 이렇게 쓰다 보면 정말 치유가 되는 게 맞느냐고.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겪었다고 해서, 내가 개운해졌다고 해서 남들도 그런 게 맞는 걸까.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썼을 때, 결국 더 상처를 입는 건 아닐까. 내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꺼내어 쓰면 오히려 며칠을 앓게 되는 글.


  글쓰기는 치유라고 자신 있게 말해왔지만, 결국 치유의 길로 가기 위한 문을 여는 건 내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그저 당신도 글을 쓸 수 있다고, 어떤 이야기든 써도 된다고, 용기를 불어넣을 뿐이다. 내 안에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일수록, 지금도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일일수록 글로 꺼내는 게 어렵다. 글로 써 구체화하고 기억이 명료해질수록 더 상처가 덧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상처를 그저 덮어두고 잊고 살아왔던 날들이 더 나아 보인다. 


  그럼에도 글을 통해 꺼내라고 하는 건, 그 상처는 결코 완전히 아문 게 아니기 때문. 평온한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삶이 흔들리면 상처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통증이 올라와 나를 갉아먹는다. 그 상처가 나를 규정짓고 내 태도와 생각까지 잡아먹기도 한다. 글을 쓰는 건 그런 상처가 다시는 나를 흔들지 못하도록 연고를 바르는 것과 같다. 깊은 상처일수록 아무는 시간은 더 오래 걸린다. 작은 문부터 하나씩 하나씩 열어 글로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은 가장 큰 문을 열어젖힐 용기가 생긴다. 


  내 경우 나를 가로막고 있는 상처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도시로 전학을 온 뒤 잠식돼 버린 십수 년 동안의 내 삶이었고, 또 하나는 부모다. 전자는 긴 소설이 되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 달 동안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쓰는 기간 내내, 쓰고 나서도 몇 달 동안, 나는 홍역을 치르듯 크게 앓았다. 인물들의 감정에 몰입돼서 울다 웃었고, 그 시절의 아픔과 행복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 현재의 나를 휘감았다. 혼란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낸 뒤에는 내 과거를 글로 쓰는 게 너무나 두려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 시간들로부터 몇 개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불현듯 한결 맑아진 스스로를 발견했다.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그 시절 벌어진 일들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나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글을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썼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그 상처는 더 이상 내게 아픔이 아니었다. 거대한 화염 속을 거닐다 다시 평온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어난 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내 과거를 또 끄집어내 글을 쓴다.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이따금 용기가 생기면 한 번씩 에세이로 쓰고 있다. 여러 차례 썼지만, 여전히 꺼낼 때마다 많이 아프다.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쓸 때마다 오히려 상처가 덧나 며칠을 끙끙 댈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쓴다. 쓸수록 가벼워진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기에. 이렇게 쓰다 보면 언젠가 모든 걸 껴안고 용서하는, 넓은 그릇의 내가 되리라 믿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 보이는 건 프로 작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글을 쓰지만, 시나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 전면에 자신이 나서는 걸 꺼려한다. 시나 소설에 비해 에세이를 가벼운 이야기, 쉽게 읽히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에세이가 귀한 건, 그 가벼운 이야기 속에 글쓴이의 진짜 상처가 담기기 때문. 그 진짜를 과감하게 꺼내 보이고 타인과 교감했을 때, 비로소 상처는 아물고 비슷한 아픔을 가진 타인까지도 토닥이게 된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는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를 허문 작가로 유명하다. 임신중절, 부적절한 관계 등 절대 타인에게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은밀한 이야기들을 아니 에르노는 작품으로 승화했다. 개인의 삶은 작품으로 거듭나는 동시에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드러내는 벼린 칼날이 된다. 이 과정에서 아니 에르노는 문학의 필수요소라 받아들여지는 뚜렷한 캐릭터 설정이나 화려한 배경 묘사들을 과감히 생략한다. 실제 경험이 가진 이야기의 힘으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으로 이번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른다.


  개개인이 겪은 진짜 이야기의 힘은 이처럼 어마어마하다. 그 어떤 작은 삶의 조각도 의미가 될 수 있다. 그 어떤 작은 이야기도 타인과 교감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치유되는 건 단지 한 개인이 아니다. 세상은 넓고 어딘가에는 분명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이가 숨 쉬며 살아간다. 나를 치유하려던 몸부림이, 한 세대를 치유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이 들면서도 끊임없이 내 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건, 그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나는 더 내가 되고, 나는 더 자유로워지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시 글쓰기 모임으로 돌아간다. 글을 통해 치유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원했던 나의 초심을 돌아본다. 그런 이들이 늘어나면 이 사회 또한 덜 아파질 거라 믿었던 내 마음을 되새긴다. 나부터 온 마음을 열어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쓸수록 단단해지는 나를 보여주고, 글로 치유하며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려 한다. 증인처럼, 선배처럼, 그렇게 뚜벅뚜벅 걷다 보면, 나를 보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삶도 꺼내 보이는 이들이 분명 늘어날 거라고. 그렇게 길잡이가 되는 게 내 소명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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