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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Dec 12. 2022

피해자로 살았던 시간의 기억 5

호랑이한테 팔이 물렸을 때, 그냥 빼면 팔이 잘리지만 팔을 더 깊숙이 집어넣어 호랑이의 숨통을 끊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역시 사건에서 벗어나려니 더 깊은 사건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누구보다 멀리 도망가고 싶었는데, 누구보다 가까이 사건을 마주하고 있었다. 원고를 읽어내려갔다. 중간에는 목이 매여 잠시 쉬어가야만 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간신히 준비한 원고를 끝까지 읽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H의 제명이 결정되었다. 한국기자협회에서의 제명은 즉, 기자협회에 등록된 언론사에 앞으로 발을 디딜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작은 성취였다. 함께 한 활동가들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동안 서로 고생이 많았다고 다독였다. 원하던 바를 이뤘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찾은 단 하나의 길이 여기였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뚫린 것만 같았다. 


이 사건은 당시 기자협회보에 기사로 실렸다. 얼마 안 가 H가 결국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는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그를 내보냈다. H는 의사 아버지에 교수 어머니를 둔 사람이었다. 부모의 인맥으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지방지에는 이런 낙하산 인사들이 꽤 많았다. 시간이 좀 지나 부모의 소개로 그가 다시 기자 일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자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작은 언론사라고 했다. 그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줄인 게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였다. K선배는 중앙에서 지방 주재기자로 몇 년간 파견을 나와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 후 기간이 만료돼 다시 본사로 복귀했다. 사과를 일부러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 아마 어딘가에서 여전히 기사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 뒤로도 나는 한참 더 그 바닥에서 일을 했다. 내가 한 일이 온당한 것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버텨야만 했다. 그 일을 겪은 후 동료 기자로부터 그런 일을 겪은 여자지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고백이 아니라 차라리 치욕이었다. 이전에는 가까이 다가오던 사람들이, 나를 슬슬 피하는 게 느껴졌다. 대인기피증이 그 무렵 나를 찾아왔다. 사람과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일을 하면서 만나는 모두가 그 일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고, 서너 명씩 모인 사람들은 죄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끝난 일이라고,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세상 모두가 내 험담만 하지는 않는다고, 매일 매 순간 되뇌어야 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때 나를 도왔던 활동가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마음을 좀 추스르면 한번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를 도와준 너무나 감사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게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다시 연락하지 못한 건 사실 마주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을 마주하는 건 다시 그 사건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일로 여겨졌다. 얼마 전 그분들 중 한 분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셨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여전히 약자를 위해 힘쓰고 계시는구나. 마음의 빚이 남았는데, 여전히 갚지 못하고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나도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으로부터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은 반디님의 글을 읽고 몸과 마음이 저릿했다. 많이 힘드시겠다는 간단한 댓글조차 달 수 없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어떤 위로도 가닿지 않는 순간일 것이었다. 교원평가에서 학생들로부터 농락당한 교사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또 몸과 마음이 아팠다. 가해자가 있는 곳에 다시 서야 하는 마음, 모두가 나를 능멸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반디님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나도 비슷한 처참함을 느낀 적이 있기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묵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의 끝은 내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할 줄 아는 건 글뿐이니, 이렇게라도 연대하고자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쓸 글이라고 생각해왔다. 지금이라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십수 년 전의 일이고, 나는 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지내니 막연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니 치욕스러웠던 날들이 떠올라 일상생활이 버거웠다. 밥을 넘기기가 어려웠고 몸에서 기운이 자꾸 빠져나갔다. 이왕 시작한 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쓰자. 좋은 글, 멋진 글이 되려는 욕심을 내려두고 그저 쓰기만 하자. 전달만 하자.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 동안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이제 그 글의 끝자락을 적고 있다. 


이렇게 내 안에 남은 모든 찌꺼기를 털어낸다. 그리고 연대하려 한다. 반디님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을 많은 피해자들과 함께. 당신도 생존자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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