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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Apr 03. 2021

행복이 뭔데

불현듯 행복이 떠올랐다

행복하다는 말을 조금 자주 하는 부모를 만났다면 난 더 자주 행복을 느끼는 사람으로 자랐을까. 작은 행복들을 자주 느끼며 자란 사람이 커서도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산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된 뒤로 육아에 도움되는 말이나 글귀가 있으면 내 것이 되든 안되든 일단 읽거나 들어두는 편인데 저 문장도 그런 습관 속에 얻어걸린 것이었다.


스물아홉, 기간도 장소도 정하지 않은 긴 여행을 다녀오겠다 일방적으로 부모님께 통보를 한 뒤 그날 나는 밤새 울었다. 행복해서. 그 여행을 몰래 준비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는데 적령기의 결혼과 모아둔 돈, 안정적인 미래 등이 거기에 속했다. 하나하나 너무 덩어리가 큰 명제들이라 차마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원동력은 단 하나였다. 정처 없이 떠돌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크다는 것. 그 꿈은 내게 너무나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걸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대한 명제도 잠재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러다 결국 적금이 만기 되는 시점에 맞춰 회사를 그만두고 비행기표를 끊은 뒤 부모님께 통보했다. 며칟날 떠나요. 얼마나 오래 어디를 다닐지 정하지 않았어요.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 올 거예요. 묻지도 않는데 불쑥 말했다. 앞으로 글 써서 먹고 살 거예요. 사기보험 같은 거였다. 이거라도 내어놓아야 부모님이 토를 달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에 불쑥 내어놓은 말.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이었지만. 부모님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었다. 그저 알았다, 하셨다.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행복해서. 내 인생 최초로 내 힘만으로 얻어낸 행복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는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예요.'라는 물음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 영화를 보며 단 한 순간도 떠오르지 않아 절망했는데, 이제 나도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부분 유년시절의 어떤 날을 떠올린다는데 그런 기억이 전무한 내게 최초의 행복이란 기억은 그렇게 간신히 스물아홉에 찾아왔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힘이 든다. 아이들은 연신 나를 찾고 뭔가를 해달라 조른다. 귀가 두 개이면 뭐하나. 한 번에 두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는데. 형아 말을 자르고 제 말을 시작한 둘째에게 말을 멈추라 말한다. 다시 첫째의 말을 듣는다. 이번엔 둘째 차례. 어른들에게는 별 게 아니지만 그들에겐 무척 별 것인 말들이다. 가끔은 듣는 둥 마는 둥 듣자마자 잊을 때도 있다. 그러다 구박을 듣는다. 엄마는 만날 잊어버려.


그런 아이들을 키우다 문득문득 행복하다. 미치게 행복하다. 아무리 봐도 아이들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준다. 그저 엄마라고 안기고 안아준다. 사랑한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해준다. 씩 웃기도 하고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도 준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행복하다. 갑자기 정신이 없어지고 온몸에 기운이 빠지지만 또 불현듯 행복하다. 아이들이란 존재는 참 신기하다. 태어나기만 했고 생긴 대로 놀고만 있는데 부모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나는 내 생애 최초의 행복이란 기억을 얻기 위해 무려 이십구 년을 고민하고 고뇌하며 준비해야 했는데, 이 녀석들은 행복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내게 행복을 준다.


나는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은 이렇게 많은 걸 내려놔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하며 감탄을 했는데 이 녀석들은 행복이 별 거야. 여깄잖아. 여기도 있고, 하며 툭툭 내게 던져준다. 행복이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꼭 각 잡고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러니까 행복이 뭔데 하고 누군가 물으면, 가족 모두가 함께 웃는 순간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백의 순간이며, 평화로운 한낮에 주어진 커피와 재밌는 책 한 권이다.


먼 나라로 가야만, 지금 이곳을 떠나야만, 행복인 줄로만 알았는데 일상을 행복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행복은 기적인 줄만 알았는데 그저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행복이란 걸 알아야만 비로소 행복이 되는 것, 그게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행복이다.


참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미래는 생각하면 안 된다. 카드값도. 타인의 연봉도. 지인의 집값도. 아이들이 커간다는 사실도. 그저 다 잊어야 한다. 지금만 느껴야 한다. 오롯이. 그래야 비로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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