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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an 30. 2023

일곱살의 현질

세뱃돈으로 현질하는 건 옳은 걸까, 그른 걸까

"엄마 나 세뱃돈으로 현질해도 돼?"


새해가 되고 무려 일곱살이 되신 둘째 아드님께서 시댁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나와 남편은 일단 좀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꼭 필요한 데 쓰라고 주신 돈이니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교과서적인 말을 덧붙이며. 신성한(?) 세뱃돈으로 현질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은 몇 달 전부터 아이패드로 게임을 시작하면서 돈에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 전에는 돈이 있어도 흥 없어도 흥, 세뱃돈을 받아도 그냥 내게 맡기고, 부루마블이나 인생역전 보드게임을 해도 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게임 세상을 만난 뒤로 갑자기 돈에 눈을 뜬 것이다.


"엄마 현질이 뭐야?"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서 게임 유튜브도 보게 됐는데, 거기서 튀어나온 현질이라는 말에 아이들이 질문을 해왔다. 

"현금은 돈을 가리키는 말이고, 현질은 현금을 지르다. 그러니까 게임에 돈 쓰는 걸 현질이라고 하는 거야."

게임에 문외한이지만 이 용어는 알고 있었기에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이들은 눈이 반짝해졌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게임에서 돈을 주고 보석을 사면 원하는 강한 캐릭터를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첫째가 물었다. 

"엄마 그럼 나도 현질해도 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돈 안 써도 게임할 수 있는데, 게임에 돈까지 쓰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너무 아까운데."

굳어진 내 표정을 감지한 첫째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게임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인 거야?"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은 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희는 아직 어린 아이들이고 직접 돈을 버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그렇지."

내가 봐도 좀 궁색한 변명이다.

"엄마 그럼 게임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어?"

"광고 수익도 있고, 현질하는 사람들이 낸 돈도 있고, 여러 수익이 있지."

그 후로도 아이들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현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이 요즘 즐겨 하는 게임은 광고가 없는 게임이었고, 캐릭터는 보석을 모아야 살 수 있는데 보석은 게임을 통해서도 잘 모으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명백한 상술이었지만, 아이들이 알 턱은 없었다. 


게임이 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지에 대해, 돈이 굴러가는 방식에 대해, 시간이 날 때마다 설명해주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나쁘다고만 말하는 것도 그리 좋은 설명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는 세상에서 돈을 피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너무 돈만 쫓는 삶도 바람직하지 않은데... 이 모순된 간극을 어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에게 설명하자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현질의 개념을 깨우친 후로, 나는 스스로가 '왜 현질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 세대의 고정관념은 아닐까.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현질하는 대신에 맛있는 걸 사먹거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중요한 일에 쓰거나, 장난감을 사는 건 어떨까 하는 회유책을 써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벽에 부딪쳤다. 아이들이 저 돈을 들고 마트에 가봤자 젤리나 사탕 따위를 고를 것이다. 장난감을 산다 해도 그리 오래 갖고 놀지 않는다. 한때 너무나 좋아했던 장난감들도 언제부턴가 한쪽에 처박혀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현질을 해서 원하는 캐릭터를 얻는다면 한동안 게임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기도 하니, 현질을 장난감을 구입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현질을 하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은 계속 남았다. 아이들에게 게임을 허락한 이후로, 아이들은 게임도 장난감처럼 한동안 하다가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기 일쑤였다. 그러니 현질을 한다 해도 아이들이 그 게임에 질려 다른 게임으로 넘어간다면 버리는 돈이 될 터였다. 가장 큰 문제는 현질은 또 현질을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좋은 캐릭터는 넘쳐나고, 한 번 현질을 하고 나면 다음에 또 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 수밖에 없다. 적정 수준에서만 현질을 하게 할 수는 없을까. 적정 수준은 얼마일까.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가 '미디어 노출'이다. 아직 핸드폰이 없어 아이들은 주로 아이패드를 통해 게임을 하고 영상을 본다. 하루 일정 시간을 정해두고 허용하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차례가 되면 일단 시간부터 맞춰놓고 게임을 시작한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모양이었다. 재밌다는 게임 이름은 어찌나 잘 알아오는지, 처음 하는 게임도 얼마나 빨리 파악하고 플레이를 하는지. 무조건 막을 수도 없고, 무조건 허용할 수도 없으니 늘 잘 하고 있는지 고민이 된다. 적정한 미디어 사용도 감을 못 잡겠는데 현질이라니.


첫째는 내 의견을 무척 신뢰하는 편이라 금세 현질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고집이 센 둘째는 달랐다. 그리 원하던 현금을 세배의 대가로 손쉽게 얻고 나니 현질이 정말 하고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뱃돈을 저금한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봉투에 담긴 채로 돈을 계속 들고 다니며 몇 날 며칠 내 눈치를 보며 고민을 했다. 결국 나는 '또 현질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그 말을 하면 그 게임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만오천 원의 현질을 허락했다. 아이에게 현금을 받고 내 카드로 결제를 해주었다. 나머지 세뱃돈은 저금을 하고.


아이는 막상 현질로 보석이 늘어난 걸 보더니 생각이 많아지는 듯했다. 바로 원하는 캐릭터를 살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보석을 쓰지 않고 그냥 보관만 해두었다. 대신 캐릭터의 면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금액 대비 공격력과 생명력 등을 비교하며 어떤 캐릭터를 사는 게 가장 이득인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내심 나쁘지 않은 소비였다는 생각이 든 건 이 지점이었다. 같은 돈이어도 그저 쓰는 게 아니라, 무엇이 더 나은 소비인지를(그게 게임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고민한다는 게 꽤 대견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어른인 나도 별 생각없이 소비할 때가 있는데. 긴 고민 끝에 결국 아이는 원하는 캐릭터 하나를 보석을 주고 샀다. 나는 열심히 고민한 부분에 대해 둘째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일곱살 짜리가 현질을 했다고 하면 아마 시선은 양분될 것이다.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부모가 너무 개념 없는 거 아냐? 나도 사실 내 아이가 현질을 하기 전에는, 현질은 생각 없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게임 산업에도 분명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게임은 이제 우리의 삶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며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은 답인 것 같아도, 미래에는 답이 아닌 경우도 참 많지 않은가.


이렇게 난해한 문제에 봉착하면, 늘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를 떠올린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아이들은 미래의 사람이기에 과거의 사람인 내 시선으로 모든 걸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으로 아이의 현질을 허락했지만, 사실 잘한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새로운 문제는 발생할 것이고, 그때마다 나는 또 깊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건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있고, 아이들도 나름의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내가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의 경우 아이들과 함께 상의를 하면, 의외로 괜찮은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혹 지금의 답이 틀렸더라도 함께 고민한다면, 조금씩 궤도를 수정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둘째가 현질을 했다. 우린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덧. 설 연휴가 끝나고 아이가 등원을 했다. 아이는 현질한 사실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노라며 신나게 등원을 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친구 두 명도 이미 현질을 했다는 것... 그것도 더 큰 금액을...!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야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섣부른 발언이었을까. 어렵다 참. 사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첫째다. 자신은 돈 한 푼 쓰지 않고, 게임에서 캐릭터를 얻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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