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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Dec 24. 2022

산타를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 부모가 되었다

  산타가 있다고 믿어본 적이 없다. 크리스마스라고 떠들어대는 티브이 때문이었는지, 선물을 기대하는 친구들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어릴 적 내게도 크리스마스는 분명 가슴 뛰는 날이었다. 하지만 선물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산타는 원래 없다고 단번에 동심을 박살 낸 어른들 사이에서 컸으니, 나의 설렘은 늘 꽁꽁 숨겨 놓아야 했다. 혹여 들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애 취급을 받아야 했으니까. 아무리 애여도 애 취급을 대놓고 받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내 주위 어른들은 그 누구도 산타가 있다는 그 흔한 거짓말 한번 내게 하지 않았다. 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라는 이유로, 부모님은 집에서 크리스마스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했다. 어린 눈에 부처님 오신 날보다는 크리스마스가 어딘가 좀 더 세련돼 보였다. 때문에 겨울이면 반짝이는 트리를 우리집에도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꺼내 보일 수는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친구들이 나처럼 산타를 믿을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크리스마스는 늘 휴일이고, 특별한 이벤트 같은 건 없으니 나는 집에서 종일 티브이만 쳐다보아야 했다. 티브이 속에는 눈부신 트리도 나오고, 산타도 나왔다.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어린 내게 크리스마스는 티브이라는 작은 상자 속에만 존재하는 날이었다. 마치 절대 갈 수 없는 우주를 티브이를 통해 보는 느낌이랄까. 꿈꿀 수도, 바랄 수도 없는, 다가오는 게 오히려 괴로운 날이 오래도록 나의 크리스마스였다. 


  내가 코 흘리던 수십 년 전보다 넉넉한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놓고 산타가 없다고 말하는 부모는 많이 사라졌다. 종교의 신념을 떠나 아이들 몰래 선물을 준비하고 최대한 오래 믿을 수 있도록 돕는 부모들. 세월이 더해지면서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떠나 세상 모든 아이들이 산타라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신이 선물을 받을 만큼 값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날이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린이날 장난감 가게에 터질 듯 모여든 인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아이들은 존중받는 대상이 아니라, 구박받고 억압받는 존재였다. 아이들은 한 명의 노동력에 불과했고, 온갖 전래동화에 나오듯 도깨비나 유령 같은 존재를 동원해 겁박당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부모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아이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요즘 육아가 유독 고되게 느껴진다면 이런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저 찍어 누르고 무시하며 키우던 시절에서,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존중하며 키우는 시대로 건너왔으니. 고단한 삶을 살며 아이들을 위한 넉넉함까지 품어야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한번 더 삶을 살아내는 것과 같기에, 아이가 더 오래 산타를 믿을 수 있게 노력하고 아이의 말과 행동을 존중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는 내 아이를 키우는 동시에 어린 나를 달랜다. 그 안에서 내가 얻는 건,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생각들과, 어른이라는 이유로 놓치고 살았던 삶의 근원들. 아이들은 자주 내 삶이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가늠하는 저울로 작용한다. 한 인간이 완성되어가는 하루하루를 지근거리에서 섬세하게 관찰하는 건 분명 큰 행운이다.


  첫째가 조금씩 의심을 시작했다. 루돌프가 끄는 썰매는 어떻게 하늘을 날까. 산타는 하루 밤 사이에 전 세계 어린이에게 어떻게 선물을 나눠줄까.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을 어떻게 그리 잘 알까. 산타가 없다고 믿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고, 그런 친구들과 대화하며 혹 산타가 부모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했다. 진짜 엄마 아냐? 응 엄마는 잤는데… 엄마는 산타 할아버지 본 적 있어? 아니 엄마도 없어. 연기는 늘어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아이들이 잠들면 주문한 선물들을 풀어놓아야 한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집안을 뒤지겠지. 눈도 못 뜬 내게 다가와 선물을 들이밀며 올해도 받았다고 신나 하겠지. 이벤트를 할 줄 모르는 내가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주문해 받아왔다. 빨갛게 잘 익은 딸기가 산타 모자와 코로 장식된 귀여운 케이크. 오늘 밤에는 그 케이크를 나눠 먹으면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생각들을 또 들어봐야지.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에서 어린 날의 나처럼 크리스마스는 티브이 속에만 존재하는 날이라 여기고 있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눠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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