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가 이 땅에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수가 존재하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꼭 숫자로 표기하지 않아도 크기나 정도는 시각으로 촉각으로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때로 인간이 숫자놀음 같은 비교로 세상을 알아가고 느끼는 동물이라는 게 비극으로 여겨진다. 비교만 하지 않았다면, 비교하는 눈을 갖지만 않았다면, 인간은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인간의 고통은 눈에 보이는 것을 비교하는 데서 오기도 하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을 비교하는 데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가령 사랑의 크기라든가, 배려의 정도라든가, 책임의 양이라든가. 마음의 크기를 비교하는 게 비극인 건, 눈에 보이는 것들과는 달리 더 클수록 이기는 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고, 더 배려한 사람이 상처를 받으며, 더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걸 짊어져야 한다.
이 단순하지만 극명한 진리를 알고 나면 허무가 몰려온다. 마음이라는 건 분명 크기를 지니지만, 물건처럼 칼로 뚝 잘라내버릴 수도 없고 점토를 덧대듯 툭 갖다 붙일 수도 없기에, 나도 모르게 지니게 된 내 마음으로 인한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다. 내가 더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상대가 나만큼 날 배려하지 않을 때, 나보다 훨씬 적은 책임감으로 타인이 임하고 있을 때, 괴로움에 휩싸이지 않을 도리는 없다.
이십 년 전 참 좋아했던 친구와 문제가 생겨 마주 앉았을 때, 나는 바보처럼 울기만 하고 친구는 연신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불만을 토해냈다. 싸움 자체보다 더 감당하기 힘들었던 건, 친구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 삼십 년 넘게 딸이라는 이유로 줄곧 청자로 살아왔지만, 엄마는 자신이 내게 어떤 상처를 새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배려했지만 배려받을 순 없었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상처는 남았다.
빨래와 설거지감이 쌓이고 집안이 엉망이어도 그걸 일이라 느끼는 사람은 가족 중 한 명에 그칠 때가 많다. 보통 주부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이 쏠린다. 다른 가족들은 애초에 책임감이 자리하지 않아, 아무리 일거리가 쌓여도 그게 일이라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살림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책임감도 그렇다. 통장에 잔고가 바닥나도 태평한 사람이 있고, 바닥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늘 생각은 맞지 않고 서운함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아무리 인지하고 노력을 한다 해도, 타인과 나 사이의 마음의 균형을 찾는 건 참 난해한 일이다. 마음이라는 게 크기가 존재하긴 하나, 자로 재고 무게를 달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게다가 수시로 요동을 쳐서 아침과 저녁의 마음 또한 같지 않으니.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타인의 마음을 어찌 조종할 수 있을까. 나를 조금 더 사랑해달라고, 나를 조금 더 배려해달라고, 조금 더 책임감을 가져달라고, 아무리 울부짖어봤자 큰 소용은 없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오랜 시간, 내가 더 사랑하는 게 못마땅하고 내가 더 배려하는 게 속상했으며 내가 더 책임감을 느끼는 게 억울했다.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내려놓은 건 사랑이었다. 풋내 나는 사랑을 몇 번 해보고는 감정이 싹트는 시기도, 때에 따른 감정의 크기도 너무나 다르다는 걸 알아채고는, 좋아하면 한없이 그냥 좋아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생각과 따로 노는 마음이라면 까짓 거 그냥 막 퍼주자. 후회라도 남지 않게.
사랑은 그렇게 해결이 됐지만, 배려와 책임은 아직도 숙제 같다. 나를 둘러싼 관계들은 아무리 잘라내도 여러 가지로 뻗어있고, 배려라는 이름으로 내가 선을 넘거나 오히려 침해를 받을까봐 늘 눈치를 본다. 관계마다 사람도 상황도 모두 다르기에. 가정에 대한 책임의 경우 남편과 나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이게 한 번 찾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수시로 여건에 따라 달리 해야 한다. 그렇다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는 관계를 지속하는데 주로 많은 에너지를 들인다.
마음의 불균형이 못마땅하다 해도 관계를 모조리 끊어낼 수는 없다. 관계를 끊는다는 건 삶을 놓는 것과 같기에. 단 하나의 관계도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기에. 만일 그런 삶이 어딘가 있다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게 맞다. 인간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다. 절대 혈혈단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어떻게든 누군가를 붙들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 그러니 내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본능이다. 어딘가 있을 내 편을 찾는 몸부림 또한 당연한 것이리라.
관계를 피할 수 없다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덜 상처받는 길은 무엇일까. 그 길은 단 하나, 재지 않는 게 아닐까. 비교라는, 인간이 세상을 알아가는 본능의 감각을 내려놓는 것. 가장 위대한 인간은 본능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이다. ‘사어는 유수하고, 활어는 역수한다’는 말처럼 본능을 따르는 쉬운 길을 거역하고 본능을 거스르는 어려운 길을 택할 때, 비로소 조금씩 단단한 근육이 붙고 웬만한 상처에도 아픔을 덜 느끼게 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만큼 시간 낭비인 것도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오롯이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더 혹은 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랑하기. 더 혹은 덜 배려하는 게 아니라, 그저 배려하기. 더 혹은 덜 책임지는 게 아니라, 그저 책임지기. 당장은 손해 같겠지만 조금 더 시선을 멀리 두면, 더 사랑하고 더 배려하고 더 책임졌기에 더 깊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고 있으니. 한 번뿐인 인생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산 삶이 곧 희극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리저리 잰다고 온전히 마음을 내주지 않았을 때, 나는 더 크게 오래 후회했다. 재기는커녕 정신 없이 사랑하고 배려하고 끝까지 책임을 졌을 때, 나는 비로소 홀가분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미련 남지 않을 만큼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니 마음을 측량하려는 허튼 생각은 버리고, 상대의 마음을 가늠하려는 허공의 손짓도 거두고, 그저 나의 마음에 나의 지금에 충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울을 집어던질 때라야 비로소 마음의 균형을 찾을 것이기에. 그저 충실하려 한다. 나의 오늘을, 나의 자리를, 그리고 나의 삶을.
*오프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숫자’입니다.